W호텔 어웨이 스파의 피부미용관리사 김영수(28) 씨는 여성의 피부를 만지는 남성이다.
최근 직업에서 남녀에 따른 성역(性域)이 무너지는 가운데 레이싱 보이, 라운드 맨, 플로리스트, 네일 아티스트 등 ‘금남(禁男)’의 벽을 성큼 넘어선 남성들이 늘고 있다.
이 스파에 근무하는 12명의 관리사 가운데 유일한 남성인 그를 최근 만났다.》
○“뭐가 고민이세요.”
한 동료가 그를 ‘에반’이라고 불렀다. 그의 영어 이름이다. 외국인 손님이 많은 호텔이기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는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선수 이반 로드리게스의 이름을 빌렸다. 하지만 주변에서 에반이 좋다고 해서 그냥 에반이 됐다.
스파의 프라이비트 룸에서 피부 관리를 받는 한 여성 고객과 그의 대화.
“피부, 뭐가 고민이세요.”
“뾰루지요.”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나요. 아니면 주기중이세요.”
“그렇지는 않은데….”
“코에 블랙 헤드(검은 피지)도 있네요. 피지도 좀 처리할게요.”
여성의 얼굴을 만지는 그의 손놀림은 자연스럽고 리드미컬했다. 3, 4평쯤 되는 공간에는 약한 조명 아래 베드와 작은 욕조가 있다. 처음 들어오는 이들은 자칫 엉뚱한 상상을 할 수도 있지만 그의 모습은 진지하기만 하다.
이 고객(28)은 “처음에는 남성 관리사여서 어색했지만 곧 익숙해졌다”며 “특히 에반에게 전신 마사지를 받으면 손가락 힘이 좋아 무척 시원하다”고 말했다.
○“남성이라서 힘들었다.”
지금은 단골 고객의 90%가 여성이지만 금남의 벽을 넘는 게 쉽지 않았다.
“가끔 전화상담을 할 때도 있습니다. 상담원 좀 바꿔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상담원이라고 했더니 ‘어머, 남자가 무슨 피부 관리냐’며 무안하게 하더군요.”
여성은 에반이 남성이라는 이유로 거부했고, 드물게 찾는 남성 고객도 그를 외면했다. 고객이 없는 빈손은 쓸모없는 손이었다. 그래서 한때 양로원을 찾아다니며 출장 서비스를 하기도 했다.
남성들의 피부미용계 진출이 늘고 있지만 한국피부미용관리사협회가 인증하는 자격증 소지자는 아직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남성피부미용관리사의 선구자로 최근 책 ‘재미있는 피부 이야기’를 낸 김상현(35) 씨는 “피부 관리를 받는 남성이 늘고 있고 여성들의 거부감도 줄어드는 등 사회 분위기가 바뀌고 있어 남성피부미용관리사의 전망은 밝다”고 말했다.
에반의 동료 김윤지(24) 씨는 “남성과는 처음으로 같이 일하는데 ‘청일점’ 덕분에 직장 분위기가 밝다”고 말했다.
○ 피부 속을 느껴라
그는 협회 자격증 외에도 타이 마사지, 왓추(watsu·수중마사지) 등 여러 마사지 관련 자격증을 갖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단순히 손의 기능이 아니라 고객과의 정신적 교감이라고 말한다.
특히 전신 마사지를 하면 가슴과 엉덩이를 뺀 모든 부문을 ‘터치’하게 된다. 초년병 시절에는 여성의 시선을 피해 다른 곳만 봤고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마사지 효과가 좋을 리 없었다. 자연스러운 대화와 교감이 손놀림도 가볍게 하고 마사지 효과도 극대화시킨다.
그는 자신의 매력을 여성보다 부드러운 손, 리드미컬한 손놀림, 남성 특유의 비교적 강한 힘을 꼽았다.
고교 졸업 뒤 직업훈련소에서 기계와 선반을 배워 건설 현장에서도 일한 그의 손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칠었다. 그는 자신의 비법이라며 손 관리법을 소개했다.
“먼저 미용 소금과 올리브 오일을 섞어 부드럽게 마사지합니다. 취침 전 미용 파라핀에 손을 담그면 팩처럼 되는데 효과가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바빠도 3, 4시간마다 핸드크림을 발라 손이 건조해지는 것을 막아 주는 겁니다.”
○ 에반의 꿈
그가 처음부터 여성의 피부를 만져주는 남자를 꿈꾼 것은 아니다.
군 복무 중 대학을 다니다 온 동료와 진로 문제를 얘기했다. 그는 “피부미용이 어떠냐. ‘헤어’는 좀 있는데 피부 쪽에서 일하는 남성은 못 봤다”고 했다. 이상하게도 농담 반 진담 반의 조언에 ‘감’이 왔다.
군 복무를 마칠 무렵 대학 피부미용학과에 원서를 내자 부친은 차라리 군대에 ‘말뚝’ 박으라고 했다.
그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1999년 기어이 피부미용과에 입학했다. 80명 정원에서 14명이 남성이었지만, 모두 헤어 디자이너 지망생이었고 피부 미용은 혼자였다.
“대학 다닐 때 가방에 책 대신 주로 마네킹과 가발, 화장품을 넣고 다녔습니다. 이상한 남자로 오해도 많이 받았죠.”
그는 앞으로 스파 시설이 유명한 호주로 유학해 스파 매니지먼트를 전공할 계획이다.
“손처럼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관리하기에 따라 손도, 인생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라운드 레이싱 놀이방…남성, 출산빼고 다 한다▼
“애 낳는 것만 남았다. 여성만의 영역은 사라진다.”
취업정보업체 ‘잡 링크’ 이인희 홍보팀장의 말이다. 국내에서 직업의 유니섹스화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달 폐막된 서울모터쇼에는 레이싱 걸이 아닌 ‘레이싱 보이’가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이 모델을 등장시킨 ‘아우디 코리아’는 “전시한 차의 콘셉트가 남성적인 데다 여성 일색인 도우미 사이에서 남성이 눈길을 끌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여성 권투 경기에도 남성들이 ‘라운드 맨’으로 링에 오르는 경우가 많다. ‘라운드 맨’은 2003년 당시 세계여자프로복싱 챔피언 이인영의 경기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런가 하면 백화점에는 여성을 상대로 화장품을 판매하는 남성이, 병원에서는 건장한 체격의 남성 간호사와 간병인이 있다. 심지어 제주도의 대명사였던 해녀들과 함께 물질을 하는 ‘해남(海男)’도 있다.
이처럼 직업의 세계에서 ‘금남’의 딱지가 사라지는 것은 취업난과 더불어 여성의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이다. 라운드 보이의 경우 이벤트 효과를 비롯해 여성 권투 경기에 많은 여성 관객을 위한 배려에서 시작됐다. 개구쟁이 아들을 둔 부모들은 이제 남성 베이비시터를 원하기도 한다.
오랜 기간 여성이 전담했던 ‘미(美)’의 영역에서도 남성의 진출이 가속화되고 있다. 피부미용관리사, 플로리스트, 네일 아티스트가 대표적이다.
호텔에 근무하는 한 여성은 “처음에는 남성 화장품 판매원이나 피부미용관리사를 만나면 어색했지만 지금은 자연스럽다”면서 “오히려 여성보다 남성 직원의 서비스가 더 좋은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인희 팀장은 금남의 영역에 진출한 남성들이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크고 훨씬 적극적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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