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음악 기행]오스트리아 아이젠슈타트

  • 입력 2005년 6월 3일 05시 28분


하이든이 30년간 봉직했던 에스테르하지 궁. 이곳에 있는 대연주회장 ‘하이든 홀’은 뛰어난 음향을 자랑한다. 사진 정태남 씨
하이든이 30년간 봉직했던 에스테르하지 궁. 이곳에 있는 대연주회장 ‘하이든 홀’은 뛰어난 음향을 자랑한다. 사진 정태남 씨
오스트리아의 동쪽 끝 헝가리와 맞닿은 부르겐란트(Burgenland) 주(州). 이곳의 주도 아이젠슈타트는 하이든(1732∼1809)이 1761년부터 1790년까지 활동했던 곳이다. 도시 이름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철의 도시’이니, 공장 연기가 자욱한 산업 도시가 연상되지만, 실은 평화스럽고 목가적인 시골 도시다. 순박한 주민, 옛부터 전해오는 아기자기한 집들과 드넓은 포도밭과 목장, 광활한 숲, 시야를 열어주는 노이지들러 호수 등은 이 도시의 매력을 한층 돋워 준다. 하이든은 이러한 환경에서 음악적 영감을 얻었으리라.

이 전원 도시의 구심점을 이루는 건축은 바로크풍의 에스테르하지 궁과 베르크 성당인데, 에스테르하지 궁은 하이든이 30년 동안 봉직했던 곳이고 베르크 성당은 하이든이 영원히 잠들어 있는 곳이다.

○ 떠돌이 악단원에서 귀족 가문 고용인으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국경 근처의 작은 마을 로라우 출신인 하이든은 떠돌이 악단에 속해 있다가 보헤미아 귀족 모르친 백작의 오케스트라를 맡는다. 이 오케스트라가 재정난으로 해산되자 모르친 백작은 그를 파울 안톤 에스테르하지 영주에게 소개한다. 이곳에서 하이든은 풍족한 급료를 받는 대신 의뢰받은 음악은 모두 작곡해야 했으며 작품을 다른 이에게 넘기는 것도 금지됐다.

하이든이 살던 집. 하이든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762년 에스테르하지가 사망하자 동생인 니콜라우스가 가문의 주역이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못지않은 웅대한 야망을 가졌던 그는 에스테르하지 오케스트라를 확대했다. 그는 음악에도 소양이 있어 바리톤(Baryton)이라는 첼로 비슷한 악기를 연주했고 하이든은 그를 위해 바리톤을 위한 작품을 200여 곡 쓰기도 했다.

하이든은 니콜라우스가 죽은 1790년까지 이곳에서 봉직했는데, 그 지위는 특권이 있는 ‘존경받는 하인’이었을 뿐이었다. 하이든은 이곳에서 일하면서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없었지만, 영향력이 있는 귀족 가문에 속해 있었던 덕분에 그의 작품은 권위를 갖고 외부에 알려질 수 있었다.

하이든은 동시대 음악가 모차르트나 뒷날 등장하는 베토벤과 달리, 참을성 있고 겸손했으며 일생을 평탄하게 살아가면서 상황에 순응했다. 즉 음악사에서 볼 때, 그는 ‘귀족의 고용인으로서의 음악가’라는 사회적 체제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순응한 마지막 대가였던 것이다.

○ 에스테르하지 궁, 일년 내내 하이든 음악 연주

하이든의 영묘가 있는 베르크 성당 위에서 본 아이젠슈타트 전경. 평화스럽고 목가적이다.

에스테르하지 궁 인근 하이든이 살던 집은 ‘하이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고, 그 앞의 길은 ‘하이든 거리’로 불린다. 박물관에 전시된 하이든의 데드마스크를 보면 마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평안한 모습이다. 그는 죽은 뒤 다가올 끔찍한 일을 조금이라도 예견해 보았을까?

1809년 5월 31일 수도 빈에서 숨을 거둔 그는 푼트슈투르머 묘지에 안장됐다. 다음 해에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후작 니콜라우스 2세의 희망에 따라 그의 시신은 아이젠슈타트로 이장되는데 이때 두개골이 없어졌다. 범인은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서기 요제프 로젠바움과 형무소 소장 요한 페터. 골상학의 신봉자인 이들은 하이든과 같은 천재 음악가의 두개골을 훔쳐 이론에 적용해 보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두개골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니콜라우스 후작은 각고의 노력 끝에 하이든의 두개골을 찾아내 시신에 붙여 베르크 성당 지하에 안장했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진짜는 로젠바움과 페터가 죽은 뒤 여러 손을 거쳐 ‘빈 악우회(Gesellschaft der Musikfreunde)’의 소유가 돼 유리관 속에 넣어져 전시되고 있었다.

20세기 초 에스테르하지의 후손 후작 파울은 이 모독적인 사건에 종지부를 찍고, 자기 조상의 충실한 하인이었던 하이든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베르크 성당 북쪽탑 아래에 하이든의 영묘(靈廟)를 만들었다. 하지만 하이든의 두개골이 빈에서 고향 로라우를 거쳐 아이젠슈타트로 온 것은 오랜 세월이 흐른 1954년이었다. 그러고 보면 매년 부활절을 앞두고 성(聖) 금요일마다 베르크 성당에서 연주되는 하이든의 작품 ‘십자가상의 일곱 말씀’은 수난당할 자신의 모습을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만년에 불멸을 꿈꾸었던 하이든. 베르크 성당은 아이젠슈타트의 ‘수호 성인’을 모시고 있고, 에스테르하지 궁 안에 있는 ‘하이든 홀’에서는 일년 내내 그의 음악이 연주되고 있으니 그는 죽어서 꿈을 이룬 듯하다. 비록 그가 이곳에서 안식을 찾게 되기까지는 130년이 넘는 끔찍한 수난의 세월이 있었지만.

정태남 재이탈리아 건축가 www.tainam-jung.com

▼18세기 사립 오케스트라 경쟁 에스테르하지家 영향력 최고▼

18세기 후반 오스트리아는 소나타 또는 교향곡이라는 새로운 기악 예술의 발상지가 되었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기악 음악에 매료됐고, 빈의 궁정은 음악가와 음악을 적극 후원했다. 당시 귀족들은 사립 오케스트라를 두고 있었는데,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들도 악기 다루는 것을 예사로 여겼을 정도였다. 이들 귀족은 예술적 야심이 대단해 저택 내에 호화스러운 오페라 극장이나 연주실을 두기도 했고, 귀족 가문들 사이에 오케스트라 경쟁이 일기도 했다. 이러한 귀족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가문이 바로 헝가리계의 에스테르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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