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SF 철학’… 우리는 ‘매트릭스’에 포획돼 있는가

  • 입력 2005년 6월 4일 08시 22분


우리는 정녕 매트릭스의 가상공간에 포획돼 있는가. SF영화 ‘매트릭스’의 철학적 주제는 데카르트의 회의론에 닿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실재가 아니라는 것, 단지 꿈일 수도 있다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우리는 정녕 매트릭스의 가상공간에 포획돼 있는가. SF영화 ‘매트릭스’의 철학적 주제는 데카르트의 회의론에 닿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실재가 아니라는 것, 단지 꿈일 수도 있다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SF 철학/마크 롤랜즈 지음·조동섭 외 옮김/284쪽·9800원·미디어 2.0

10년 전의 당신은 오늘의 당신과 같은 사람인가?

10년 전 당신의 육체를 구성했던 거의 모든 세포는 죽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었다. 남아있는 것은 뇌세포뿐이다.

어디 몸뿐인가. 당신의 정신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10년 전에 믿지 않았던 것을 지금은 믿을 수도 있다. 지금의 기억과 욕망, 두려움은 10년 전엔 없던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은 결코 같은 강에 두 번 몸을 담그지 않는다.”(헤라클레이토스)

그런데도 지금의 당신과 과거의 당신을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반박한다. “당신이 항상 변하고 있다고 해서 당신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시간을 관통해서 존재하는 자아는 과연 있는 것일까.

저자는 ‘B급’으로 치부됐던 SF영화 ‘토탈 리콜’을 통해 개인의 정체성 문제를 무섭게 파고든다. 무엇이 한 인간을 규정하는가. 나를 타인과 구별해 주는 것,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를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인가. 육체? 뇌? 영혼?

‘우리 시대의 가장 철학적인 감독’ 폴 버호벤은 하우저와 퀘이드란 두 사람으로 살아 본 아널드 슈워제네거를 통해 그것은 바로 기억이라고 단언한다.

자신의 기억을 지운 뒤 새로운 기억, 퀘이드의 기억을 이식한 비밀요원 하우저. 두 사람은 동일 인물인가.

“퀘이드와 하우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그들은 단지 다른 시간에 우연히 같은 육체를 공유했을 뿐이다. 기억을 대체하는 것은 죽음에 비견된다.”

저자는 또 다른 SF영화 ‘6번째 날’에 기대어 정체성의 문제를 그 극단까지 추궁한다. 내가 복제된다면 ‘복제된 나’와 ‘진짜 나’는 같은 사람일까. 만약 내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으로 복제된다면? 과연 나는 있기는 한 것일까.

철학은 이 책에서 SF영화들을 통해 화려하게 부활한다. SF영화는 철학적 주제를 퍼 올리는 생생한 텍스트다.

“왜 하필 SF영화냐고? 그곳에서 나를 ‘타자(他者)’로 만나기 때문이다. 외계인, 괴물, 사이보그, 투명인간, 미래인간…. 이들은 모두 우리 존재를 비쳐 주는 타자, 거울과 같다.”

저자는 11편의 SF영화를 통해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가 사는 이곳은 어디인가? 죽음은 무엇인가? 선과 악은? 수천 년 동안 철학이 제기해 온 인간존재에 대한 의문이 술술 풀려 나온다. 철학은 한결 친절해지고 영화는 깊이를 얻는다.

저자는 최고의 SF영화로 꼽히는 ‘블레이드 러너’를 삶의 의미와 죽음의 문제를 반추하는 경전으로 읽는다.

죽음은 나쁜 것일까. 죽음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죽어 가는 사람에겐 나쁜 것일까. 죽음이 앗아 가는 것은 우리의 미래라고? 그런데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를 어떻게 잃을 수 있단 말인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말하지 않았던가. “죽음은 우리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죽음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죽음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진지한 철학적 논의는 인생의 지혜를 깨치는 명상 속으로 침잠한다.

죽음은 삶의 한계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앗아 가는지 모른다. 삶이 우리에게 베풀었던 모든 가치를 앗아 갈지 모른다. 하지만 애당초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준 것은 바로 죽음이었다.

“죽음의 해악과 삶의 가치는 동일한 것이다. 우리가 죽을 때 이 모든 순간들은 시간 속에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존재했다면, 그것은 우리가 죽음과 결속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죽음이 삶을 드러내는 지평선이라면, 생(生)의 매순간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자, 이제 죽을 시간이다!”

이기우 문화전문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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