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가 넘도록 서구의 과학기술을 따라가느라 숨이 턱에 차던 한국인들이 이제 서구인들을 밀어내며 선두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은 정말 가슴 뿌듯한 일이다. 그러나 일찍이 이런 기쁨을 누리다가 그 과학기술의 엄청난 위력을 깨달은 서구인들이 던지는 ‘경고’는 최근 한국사회의 들뜬 분위기 속에 소리 없이 묻혀버리고 있는 듯하다.
물론 치열한 선두 경쟁에 겨우 뛰어든 상황에서 과학기술의 빛과 어둠을 함께 바라보는 반성적 성찰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하지만 선두에 선 자의 책임은 남을 뒤따라가던 시절과는 그 ‘무게’가 다르다.
조선 최고의 석학으로 추앙받던 이황이 젊은 제자 기대승과 수년간 인간의 도덕적 본성과 그 작용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벌이다가 기대승에게 한 수 충고를 했다. 그 요지는 ‘개념들의 논리적 정합성만 따지지 말고, 대체 왜 성현들이 인간의 도덕적 본성과 심리작용에 관해 그렇게 수없이 논의를 해왔는지 생각해 보라’라는 것이었다.(‘퇴계 선집’·현암사·1982년) 이황은 성리학 이론의 논리적 정합성보다 실질적인 교육적 효과에 더 주목했던 것이다.
논의의 결론이 쉽게 나지 않을 때는 어느 편이 옳은지 따지기를 멈추고 근본에서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금 왜 이 논쟁을 하고 있는가, 이 논쟁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가. 옳고 그름을 넘어선 진정한 ‘답’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나온다.
‘왜 과학기술을 연구하는가’, ‘과학기술 연구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가’.
‘예기(禮記)’ 예운편(禮運篇)의 대동(大同)사회나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 그려냈던 이상향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은 모두가 평등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며 약자가 보호받는 세상을 꿈꿨다. 그리고 과학기술은 바로 인류의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한 도구였다.
하지만 정보통신의 발달 덕택에 시공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한편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점점 더 시간에 쫓기며 전 세계를 상대로 경쟁하기에 숨 가빠하는 것이 현대인이다. 생명공학 덕분에 난치병을 극복할 수 있는 한편 생명공학의 예측 불가능한 오용 가능성에 두려워하는 것이 현실이다.
1938년 원자핵반응을 발견하고는 도리어 원자폭탄의 탄생을 우려했던 독일의 핵물리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가 신학자 카를 바르트에게 물었다. “제가 계속해서 물리학을 해도 되겠습니까?” 바르트가 대답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다면 물리학을 계속해도 될 것입니다.” 바이츠제커는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계속 물리학을 하겠습니다.”(‘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철학과현실사·2003년)
물론 기독교인만이 물리학을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자신이 가고 있는 길에 대해 끊임없이 반성적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연구자로서의 긴장감과 초심(初心)을 지킬 수 있는 확고한 신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김형찬 고려대 연구교수·한국철학 kphilos@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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