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알드 달(1916∼1990)은 영국 공군으로 전투기를 몰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소설가가 된 사람이다.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 정영목 씨에 따르면 그는 순전히 입심 하나로 당대의 여배우인 패트리셔 닐을 유혹해 결혼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달변이라고 한다.
달이 숨진 해에 그의 단편들 가운데 독자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작품들을 골라 묶은 이 책 ‘맛’을 읽다 보면 마치 미국의 선배 작가인 오 헨리가 다시 살아나 예전보다 훨씬 더 능청스럽고 노회하게 쓴 이야기들을 맛보는 것 같다. 퇴근 후 술자리에서 “이봐, 내가 정말 신기한 이야기 하나 들려 줄 테니 오늘 한잔 살 테야?”라며 술술 혀를 움직이는 능란한 이야기꾼의 솜씨가 느껴진다.
타이틀 작품 ‘맛’에는 ‘혀끝’이 대단히 발달한 리처드 프랏이 나온다. 혀끝이 발달했다는 것은 그가 알아주는 미식가인 데다가 음식 품평에 아주 화려한 표현을 쓴다는 뜻이다. 프랏이 포도주 맛을 본 뒤에는 이런 식으로 말한다. “약간 수줍어하고 망설이긴 하지만 조신하군요.” “글쎄요, 자비롭고 명랑하지만 좀 외설적인 데가 있는데요.”
미식가 협회장인 그는 마이크 스코필드라는 신사의 단란한 집을 방문해서 진수성찬을 차례차례 음미한 다음 아주 진귀한 포도주가 생산된 연도와 어느 포도밭에서 나왔는지 알아맞히는 내기에 나선다. 프랏이 지면 집 두 채를 주고, 이기면 스코필드의 아리따운 딸을 애첩으로 삼게끔 하는 어이없는 조건이다.
아슬아슬한 미각의 모험에 나선 프랏은 프랑스의 갖가지 포도밭 이름들을 한참 떠올려 보더니 “샤토 브라네르 뒤크뤼 1934년산”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정답을 내놓는다. 하지만 승자의 오만한 표정이 그 얼굴에서 가시기도 전에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다.
이 책에 실린 ‘남쪽 남자’와 ‘항해 거리’에도 내기하는 사내들이 나온다. ‘맛’의 프랏이 속임수에 능한 엉큼한 너구리 같은 사내라면 이 두 작품에는 뭔가 한참 모자라는 중년 사내들이 나온다. ‘항해 거리’는 배 위에서 돈내기에 나선 사내가 판돈을 싹쓸이하려고 실로 ‘용맹하게도’ 바다로 몸을 던지는 영웅적이면서 거창한 작전을 구사하는 이야기다. ‘남쪽 남자’는 시간만 나면 “내가 가진 캐딜락을 주거나, 네 왼쪽 새끼손가락을 자르는 조건으로 내기해 보자”고 접근하는 한 사내와, 그를 ‘무지막지하게’ 압도한 한 여자의 이야기다.
달의 소설은 문학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리더스 다이제스트 같은 잡지에도 어울릴 만한 이야기들이다. 하나도 영웅적이지 않으면서도 한번 과감하게 승부수를 던졌다가 비참하게 쪼그라드는 미국 소시민 남성의 초상화가 갖가지 색채로 그려져 있다. 잔꾀를 부려서 작은 승리를 거두는 남성의 이야기도 있다. ‘빅스비 부인과 대령의 외투’ 같은 작품이다. 이들 작품의 공통분모는 강요하는 메시지는 없지만 기발한 반전으로 재미 하나는 확실하다는 점이다. 정영목 씨는 ‘번역자의 말’에서 “재미없다는 쪽에 당신이 내기를 걸면 아마 남아날 손가락이 없을 것”이라고 썼다. 원제는 ‘The Best of Roald Dahl’(1990년).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