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의 ‘사회계약론’이 18세기를 대변하고,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19세기를 대변한다면,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은 20세기를 대변할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문예잡지 ‘애틀랜틱 먼스리’가 이 책에 바친 헌사다. 이 책을 읽어본 사람들은 대부분 이 평가가 과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과장은 어떤 주장을 담아내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다. 그렇다면 애틀랜틱 먼스리가 담아내려고 한 전략은 무엇일까.
1929년부터 스페인의 일간지 ‘태양(El Sol)’에 기고했던 글을 모아, 1930년 단행본으로 엮어 간행된 이 책은 20세기 사회의 특징을 ‘대중’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자기만족의 시대’라고 규정한다. 이 책은 어디를 가나 군중으로 가득 차 있다며 대중의 전면적 출현에 눈을 비비며 놀라워한다. 여기서 대중은 특별한 자질이 없는 사람들의 집합체, 곧 ‘평균인’이다.
이들의 특징은 수준이 낮고, 좋고 나쁜 것도 구별하지 못한 채 제 권리를 주장하는 데만 급급하고, 사회적 존재로서 자신의 책임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 버린다. 이런 대중은 역사에 늘 존재했다. 인류는 소수의 뛰어난 인물들과 다수의 평범한 대중의 역동적 조합을 통해 발전해 왔다. 저자는 심지어 “인간사회는 본질적으로 ‘귀족적’이며 비귀족화되는 순간 사회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민주주의가 도입된 19세기까지만 해도 공공문제에 관한 정치적 판단과 통치의 기능은 자질을 갖춘 우수한 소수, 곧 귀족에게 맡겨졌다. 대중은 이런 활동에 직접 참여하려 하지 않았고 다만 그런 소수자 중에서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간접민주주의다.
그러나 20세기가 되면서 ‘대중은 법을 따르지 않고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 물리적 압력을 행사하면서 자신들의 열망과 욕망을 실현’시킨다. 다시 말해 그들은 스스로 지배하려 든다. 그들은 ‘자신이 평범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당차게 평범함에 관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그것을 어디서든 실현시키려’ 한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대중의 반역’이다. 과대(過大)민주주의이고 직접민주주의다.
이 같은 내용만 보면 저자야말로 ‘대중에 대한 반역자’이다. 이는 곧 현대의 반역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책이 나온 시기를 고려해 보자. 1930년은 스페인에서는 생디칼리즘을 앞세운 프랑코의 권위주의 정부가 등장을 앞둔 시기였다. 또 유럽 전역에서 볼셰비즘과 파시즘이 위력을 떨치던 시기였다. 볼셰비즘과 파시즘은 모두 대중에 기초한 폭력적 이데올로기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다시 애틀랜틱 먼스리의 평가로 돌아가 보자. 민주주의와 대중문화의 전파자라고 자처하는 미국 잡지가 왜 대중민주주의를 비판할까. 그 배경에는 민주주의를 먹고 자라는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를 경계하자는 사고가 깔려 있다. 또한 미국은 공공의 덕성을 함양하고 사회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자연귀족’(세습귀족이 아닌)이 끌고 가야 한다는 신념도 작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21세기 한국에서 이 책의 의미는 무엇인가. 다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따돌림당하는 ‘왕따 현상’과, 평범함이 비범함보다 우선되는 반지성주의, 그리고 대중의 ‘직접 행동’을 강조하는 참여민주주의 시대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 아닐까. 원제는 ‘La Rebelion de las Masas’(1930년).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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