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78>卷六. 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6월 8일 03시 28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하지만 저 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쩌시겠소? 배부르고 편안한 대군이 높고 든든한 성벽에 의지해 굳게 지키는 성을 억지로 들이치다 우리 군세만 피폐해지지 않겠소?”

패왕 항우가 이죽거리듯 그렇게 범증의 말을 받았다. 하지만 범증은 아직도 패왕의 뒤틀린 심사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한층 간곡한 어조로 권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장이라도 대군을 들어 형양성을 들이치도록 하십시오. 적은 이제 지치고 군량도 다해 며칠 안으로 항복하고 말 것입니다. 지금이 형양성을 깨뜨리고 유방을 잡아 죽일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러자 더 참지 못한 패왕이 범이 으르렁거리듯 소리쳤다.

“아부(亞父). 지금 내 가슴과 배가 곪고 썩어들어 가는 판에 적을 돌아볼 겨를이 어디 있소? 이 장졸을 거느리고 어디를 치며 누구를 잡아 죽인단 말이요?”

“대왕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가슴과 배가 곪고 썩어들어 가다니요? 그리고 이 장졸이라니요? 대왕의 장수들과 강동의 자제들이 어찌됐다고 그리 말씀하십니까?”

그제야 놀란 범증이 패왕을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다. 그와 같은 범증의 물음을 받자 패왕도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억지로 목소리를 부드럽게 해 둘러댔다.

“그리 놀라실 것은 없소. 반드시 무슨 일이 있는 것도 아니라…. 다만 사자가 형양성 안에서 보고 들은 것 중에 놀라운 일이 있어 잠시 과인의 감정이 격해졌던 듯하오.”

그리고는 잠시 숨을 가다듬은 뒤에 다시 덧붙였다.

“과인이 숙부를 따라 오중(吳中)을 나온 뒤로 크고 작은 싸움을 수없이 치렀건만 언제 진 적이 있소? 형양성을 치는 것도 싸움, 싸우는 일이라면 과인에게 맡겨주시오. 군사를 내고 아니 내는 것은 모두 과인이 알아 결정하겠소.”

그 말에 범증도 더는 패왕을 몰아댈 수 없었다. 뭔가 석연찮은 느낌이 들었지만 패왕의 군막에서 물러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패왕은 다음날이 되고 또 다음날이 되어도 군사를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사흘이 지나자 마음이 다급해진 범증이 다시 패왕의 군막을 찾았으나 위사(衛士)들이 왕명을 구실로 범증을 안으로 들여 주지도 않았다. 그런데 범증이 하릴없이 거처로 돌아오니 뜻밖에도 용저와 종리매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장군들이 어찌하여 이 누추한 곳을 찾으셨소?”

범증이 놀란 눈으로 그들을 보며 물었다. 종리매가 대답 대신 긴 한숨과 함께 되물었다.

“아부께서는 대사마(大司馬) 주은(周殷)의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아니, 못 들었소. 주은이 어떻게 되었소?”

“간밤에 쫓기듯 구강(九江)으로 떠났습니다.”

그 말을 듣자 심상찮은 느낌이 든 범증이 두 사람에게로 바싹 다가앉으며 물었다.

“주은이 구강으로 갔으면 갔지, 쫓기듯 떠나다니 그게 무슨 뜻이오?”

“항백을 대신해 구강을 지키라고 보냈지만, 딸려 보낸 군사가 겨우 백여 기(騎)라 맨몸으로 보낸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거기다가 항백에게는 구강에 있는 전군을 거느리고 대왕 곁으로 오라고 했다 하니, 주은이 구강으로 쫓겨 간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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