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로예술인 인생채록’ 2차작업 완료

  • 입력 2005년 6월 8일 03시 28분


《한 사람의 일대기를 구술 받아 정리하는 것은 그대로 역사다. 생동감 있는 언어들, 기억에 의존하기는 하지만 경험이 실려 있는 살아 움직이는 듯한 현장 이야기들은 정사(正史)기록과는 또 다른 역사를 느끼게 한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원장 현기영)이 원로 예술인 100명을 선정해 추진하고 있는 ‘한국 근현대 예술사 구술채록사업’의 2차 작업이 완료됐다. 80세 안팎의 예술인 18명을 심층 인터뷰해 200자 원고지 3만 장 분량으로 묶어냈다.》

진흥원 산하 한국예술연구소 이인범 수석연구원은 “1차 작업 때는 노년까지 영광과 축복 속에 사는 사람이 많았던데 비해 이번 2차 작업의 대상 중에는 생계의 위협을 느끼며 노년을 보내고 있는 이도 많았다”고 전했다.

이번 2차 작업 대상은 김규동(시인) 김수악(진주검무) 김학수(한국화가) 남정현(수필가) 박을복(자수·刺繡) 반야월(대중가요 작사가) 변시지(서양화가) 신출(변사) 안일승(피아니스트) 양소운(탈춤) 이광노(건축가) 이대원(서양화가) 장민호(배우) 전황(무용·국악) 조경희(수필가) 차범석(극작가) 한용희(동요작가) 황정순(배우) 씨 등 18명. 채록된 예인(藝人)들의 삶을 네 갈래로 나눠 간략하게 정리해본다.

○서울의 주류 예술인들

이대원(84) 화백은 경성제대 법대를 졸업하고 홍익대 총장과 대한민국예술원장을 지낸 화단의 주류였지만 “미술학교를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마추어 취급을 받아 마음고생도 많았다”고 고백했다.

‘파란마음 하얀마음’의 작곡가 한용희(74) 씨는 1954년 KBS 프로듀서로 입사해 우리나라 동요 운동의 불씨를 지핀 이야기, 한국의 동요라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독특한 장르이며, ‘파란마음 하얀마음’이 북한에서도 불릴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지방의 선구적 예술인들

변시지(80) 화백은 여섯 살 때 일본에 건너가 스물셋에 일본 아카데미즘의 중심인 광풍회에서 역대 최연소로 최고상을 수상했으나 1957년 귀국 이후 파벌 중심의 한국 화단에 싫증이 나 제주도로 내려가 이단자로 살게 된 체험을 이야기했다.

우리나라 피아니스트의 원조격인 안일승(80) 씨는 대전, 충남 지역에서 음악교사로 활동하면서 학교가 생길 때마다 교가를 만들어줘 자신이 지은 교가가 60여 개에 달하며, 지방에서 숱한 제자를 배출한 보람을 구술했다.

○예술의 경계를 깬 선구자들

무성영화 시대에 국민을 웃기고 울렸던 영원한 변사 신출(76) 씨는 “변사는 앵무새가 아니라 늘 새롭게 말하는 창작가”임을 웅변하는 인생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홉 살 때 기방에 들어가 전통가무를 익혀 제자들을 길러 낸 진주검무 중요무형문화재 김수악(79) 씨와 봉산탈춤 인간문화재 양소운(81) 씨는 고단했던 근현대 여성 예술인의 삶을 당당하지만 수줍게 회고했다.

개성 호수돈여자고등학교와 이화여대, 일본 여자미술학교 사범과를 졸업한 엘리트 여성으로서 자수에 매진한 박을복(90) 씨의 인생 이야기는 여성들의 표현수단이 없었던 시절, 자수가 대중적인 페미니즘 예술장르였음을 보여준다.

○대중 예술가들

배우 황정순(80) 씨는 연극무대에서 출발해 영화배우, TV드라마 등 1960년대 본격적인 영상시대까지도 일관되게 대중의 인기를 받은 드문 배우로 꼽혔다. 한국의 어머니역 원조격인 황 씨는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지만 전쟁과 병으로 형제들을 모두 잃고 혼자 남은 자신을 키워 준 어머니의 헌신과 사랑이 자신을 배우로 키웠다고 고백했다.

예술사 구술 채록 작업은 2006년까지 진행된다. 문예진흥원 산하 예술정보관(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옆·02-525-3495)에서 1차 채록 자료(책, 동영상 CD 등)를 무료로 볼 수 있다. 2차 작업의 결과물은 7월 중순부터 만날 수 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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