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연애의 목적’이 여타 영화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지점은 바로 이 대사가 아닐까 싶다. 전후 맥락을 모르면 이 말은 여러 뜻으로 들린다. 20년쯤 전 한국영화에서는 흔히 부모의 반대로 맺어지지 못하는 남자에게 여성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기 전날 밤 했던 말이었다. 내 순결을 당신에게 주고 떠나겠다는 뜻으로.
그러나 만난 지 며칠 안 되고 말도 몇 마디 건넨 적 없던 남자가 여자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그건 생뚱맞기를 떠나 뺨을 맞아도 시원치 않을 일이었다. 그런데 ‘연애의 목적’의 남자주인공 유림(박해일)은 순진하게 눈웃음까지 치며 스스럼없이 그렇게 말한다.
고등학교 영어선생인 26세 유림의 반에 27세 교생 홍(강혜정)이 배정된다. 유림은 홍에게 “원하면 자고, 부담 없이” “같이 자면 서로 편해질 수 있어요” “좋은 호텔 많은데…” 같은 말을 던지며 집요하게 추근댄다. 유림에게는 6년간 사귄 여자친구가 있고, 홍에게도 의사인 남자친구가 있다. 그러나 “좋고 끌리는 사람끼리 연애만 하자고요”라며 끈덕지게 달라붙는 유림에게 홍도 마음을 주기 시작한다. 둘은 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이 섹스가 연애가 되기까지는 난관이 많다. 특히 홍은 사랑하던 남자에게 배신을 당한 쓰라린 경험이 있다.
최근 영화에서 성(性)이라는 것이 신줏단지 모시듯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대상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배창호 감독의 ‘러브스토리’(1996년)에서 노총각 노처녀 커플인 성우와 수인이 지리산 민박집에서 첫 관계를 가질 때 차곡차곡 개켜진 수인의 속옷으로 상징되는 그런 진중한 태도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연애의 목적’도 그런 성을, 아니 섹스를 대사와 행위를 통해서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젖었어요?”(유림이 홍에게) 같은 질펀한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뱉는다. 마치 ‘요즘의 젊은 남녀는 다 이런 식이야’라는 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연애의 목적’은 제작사가 주장하듯 그리 발칙하지는 않다. 임상수 감독의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년)나 유하 감독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2년)가 보여줬던 여성의, 혹은 결혼한 여성의 드러나지 않은 섹스라이프 조명류의 사회적인 발언은 찾기 어렵다.
요즘 젊은이들의 자유로운 연애관을 말하고자 했다면 유림과 홍이 각자의 연인들과 있을 때 보이는 권태로움은 불필요했다. 유림과 홍이 서로에게 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이 이미 사회적 관습에 사로 잡힌 발상이기 때문이다.
섹스를 쉽고 편하게 말하는 유림을 발칙하다고 한다면 그것도 시대착오적이다. 강철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발바리의 추억’(1989년)에서 주인공 달호도 어떻게 하면 만나는 여자마다 ‘자빠뜨릴’ 수 있을까에 골몰했고, ‘강원도의 힘’(1998년) 이래 홍상수 감독 영화의 남자주인공은 어떻게 하면 여성을 여관에 데리고 가느냐에 몰두했으니까.
‘연애의 목적’은 “좋아해요” “사귀고 싶어요”라는 말 대신 “섹스하고 싶어요”라는 말을 사용하는 한 남자의 순애보다. 영화 후반부에서 큰 절망에 빠진 유림은 오히려 달호나 ‘극장전’(2005년)의 동수만도 못한 패기 없고 초라한 남성으로까지 보인다.
한편 발칙해 보이는, 가볍고 충동적인 섹스의 가면을 썼지만 이 영화는 본질적으로 연애에 관한 전통적 이야기 관습에서 몇 발자국 벗어나지 못했다. 연애란 결국 같은 언어로 말하기라는 것. 남녀심리 분석의 베스트셀러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에서도 알 수 있듯 전혀 다른 언어를 쓰는 남녀의 연애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영화 마지막, 홍은 유림에게 말한다. “같이 잘래. 같이 자고 싶어.”
수학여행을 간 경주 여관방에서 유림이 홍을 거의 겁탈하는 장면을 빼놓는다면 박해일이 맡은 유림은 불쾌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다. 10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 가.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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