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어둠의 저편’…시간속 기억통해 구원의 길 찾아

  • 입력 2005년 6월 11일 03시 27분


일본 도쿄의 밤 11시 56분. ‘어둠의 저편’으로 100km 떨어진 후지 산이 서 있다. 불 켜진 빌딩들의 네트워크 속에서는 어떤 삭막한 디지털이 오가고 있을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새로운 피조물 에리와 마리는 추억을 연료 삼아 이 야경에서 사랑의 꿈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일본 도쿄의 밤 11시 56분. ‘어둠의 저편’으로 100km 떨어진 후지 산이 서 있다. 불 켜진 빌딩들의 네트워크 속에서는 어떤 삭막한 디지털이 오가고 있을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새로운 피조물 에리와 마리는 추억을 연료 삼아 이 야경에서 사랑의 꿈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어둠의 저편/무라카미 하루키 지음·임홍빈 옮김/310쪽·9500원·문학사상사

《무라카미 하루키가 지난해 등단 25주년 기념으로 소설을 썼다. 그는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등단한 후 50세가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 젊은이들의 감성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는 작가로 평가받아 왔다. 그런데 4반세기가 흐른 지금 하루키는 변했다. 자본주의 체제가 성숙한 나머지 해체의 경계에 서 있는 21세기 도시, 거짓이 진짜를 대체해 버린, 영상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 되어 버린 이 시뮐라크르(simulacre·복제본)의 세계에서 그는 오히려 사랑에 대해 긍정적이 되었다.》

밤 11시 56분에서 다음 날 아침 6시 52분까지 일곱 시간 남짓, 어둠 속에서 도시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두 자매가 나온다. 에리와 마리. 언니인 에리는 잡지 모델이 될 정도로 미인인 반면 마리는 평범한 외모이나 똑똑하다. 두 자매는 서로가 가지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면서 상처 입고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러던 중 대중의 시선 앞에서, 그 욕망의 대상으로 봉사해 온 에리가 두 달 동안이나 깊은 잠에 빠져 버리고 마리는 밤으로의 긴 여행을 떠난다.

이 설정은 ‘율리시즈’에서 아내를 집에 두고 거리를 배회하는 주인공의 그것과 같다. 하루키가 작품 구상을 위해 아일랜드로 떠났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근대 초기 거리 산책자의 의식의 흐름은 21세기로 들어와 변한다. 그 변화의 핵심을 정확하게 포착한 점, 작가의 25년의 역량이 한눈에 드러나는 대목이다.

소설의 시점은 ‘우리’이면서 감정이 배제된 기계의 눈, 카메라의 눈이다. 등장인물의 일거수일투족이 빠짐없이 기록되는 방식은 기술문명에 의해 이루어진 감시망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밤의 도시는 거대한 디지털 스크린이 반짝이고 게임 센터의 전자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중국인 매춘부를 구타한 익명의 남자는 방범 카메라의 DVD에 포착된다. 기계의 감시망이 근대도시가 낳은 익명성을 제거해 버리고 모든 사람을 기계의 네트워크 안에 옭아맨 것이다. 네트워크에 감염된 인간은 그 본질을 잃어버리고 메마르며 비정해지게 된다. 기계와 인간의 상호침투로 기계처럼 변해 버린 인간의 모습은 에리를 바라보는 TV 속의 남자로 상징된다. 에리는 매스미디어에 노출돼 대중의 시선에 자신을 종속시키며 대상으로 살아 왔다. 이제 그 불특정 다수는 기계의 음험한 눈으로 에리를 노려보고 있고 그녀는 그 속박에 꼼짝도 못하고 깊은 잠 속에 갇혀 있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정상적인 내부에 ‘저쪽 세계’가 몰래 숨어 들어와 있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폭력적이 되어 간다. 기계는 냉정하게 인간을 기록하고 있다. 인간 또한 차가워진다. 이 삭막한 기록의 세계에 구원의 통로는 없는 것인가?

작가는 그 방법을 인간이 자신의 소중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데서 찾고 있다. 다카하시는 마리를 보는 순간 몇 년 전 수영장의 기억을 떠올림으로써, 아름다운 에리보다 그녀를 먼저 기억해 냄으로써 진정한 사랑을 이룬다. 마리는 긴 밤의 여정을 통해 어린 시절,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을 때 암흑 속에서 언니 에리와 일체감을 느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녀는 비로소 깊은 잠에 빠지며 에리와의 소통을 회복한다.

여기서 작가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중요한 말을 한다. “인간이란 결국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어.” 그녀의 힘든 삶을 견디는 유일한 힘은 과거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이라는 것이다. 이 디지털 시대에도 우리의 구원자는 프루스트식의 ‘순수 의식’인가 보다. 때 이른 무더위로 사막처럼 열기가 넘쳐 나는 요즈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밤으로의 위험한 여행을 떠나 보자.

최혜실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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