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날씬한 것들은 가라. 곧 뚱뚱한 자들의 시대가 오리니. 먹어라 네 시작은 비쩍 곯았으나 끝은 비대하리라!” 큰 머리를 흔들며 비대한 몸을 이끌고 나타난 뚱뚱녀 교주가 두 팔을 펼치며 외친다. 이어 손뼉을 치며 찬송가 비슷한 노래를 부르다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 “먹다 지쳐 잠이 들면 축복을 받으리니, 여러분! 먹쉽니까∼?”라고 소리친다. 청중은 일제히 “먹습니다!”라고 외친다. KBS 2TV 개그 콘서트 ‘출산드라’의 한 장면이다.
#‘김삼순 신드롬’
30%대 시청률을 기록하며, ‘파리의 연인’을 이을 대박 드라마로 기대를 모으고 있는 MBC 미니시리즈 ‘내 이름은 김삼순’의 주인공 탤런트 김선아는 대표적인 ‘뚱뚱녀’ 이미지로 파죽지세의 인기를 몰아가고 있다. 김선아는 ‘뚱녀 노처녀’라는, 그동안 드라마에서 만나기 쉽지 않았던 캐릭터를 위해 실제 몸무게를 6kg이나 늘렸다.》
‘몸짱’에 대한 열망과 ‘다이어트’가 종교가 되다시피 한 이 시대에 ‘출산드라’의 외침과 ‘김삼순’의 당당한 모습은 신선함을 넘어 통쾌함까지 준다. 한마디로 ‘몸’을 화두로 한 생각의 전복 현상이다.
KBS 2TV 코미디 프로그램 ‘폭소클럽’의 인기코너 ‘X파일-마른 인간에 관한 연구’는 아예 마른 인간들이 멸종하고 뚱보들이 주류가 된 2222년 가상사회를 상정해 날씬한 인간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롱한다. 개그맨 유민상이 뚱뚱한 몸에 의사 가운을 입고 나와 ‘햇반’을 가리키며 “(21세기의 마른 인간들은) 왜, 이렇게 한 숟가락씩 포장을 했던 것일까요?”라고 묻는다.
‘뚱뚱한 것’이 오히려 ‘실력’을 강조하는 요소로 이어지기도 한다. 여성 4인조 그룹 ‘빅마마’가 대표적인 경우. 최근 2집 앨범을 낸 ‘빅마마’는 뚱뚱한 이미지를 앞세워 몸매가 아닌 ‘실력’으로 승부한다는 마케팅 전략에 성공했다.
‘몸의 반란’은 이제 대중매체에서의 인기몰이를 넘어 당당한 문화코드로 자리매김하는 중이다.
올해 4월 서울 강남구 대치동 섬유센터 이벤트홀에서는 신체 사이즈 ‘88’ 이상 여성들이 참가한 ‘빅 위민(Big Women) 패션쇼’가 열렸다. 홈쇼핑에선 뚱보 전문 모델들이 상한가를 치며 활약 중이다.
예술가들은 한발 더 나아가 ‘있는 그대로의 몸을 사랑하자’는 인문학적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몸을 캔버스로 한 다양한 작업을 선보인다.
7월 3일까지 종로구 신문로 성곡미술관에서 열리는 ‘아시아-여성-섹슈얼리티’전에도 몸을 화두로 아시아 각국의 여성 작가들이 다양한 작품을 내놓았다.
사비나미술관 이명옥 관장은 “과거 예술가들의 몸 퍼포먼스는 ‘팔 수 없는 작품을 만들자’는, 미술의 상업성에 대한 저항 차원이었으나 요즘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는 다양한 몸 작업들은 더욱 다양한 메시지들을 던져 준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몸의 반란’의 배경으로 △갈수록 치열한 경쟁에 내몰린 현대인들의 ‘믿을 것은 내 몸밖에 없다’는 절박감 △멋들어진 말로 포장된 관념과 이상주의가 난무하지만 결국 알맹이는 없는 정치 문화에 대한 혐오 △장수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안 먹고 아프면서 오래 사느니 날씬하진 않아도 건강이 우선이라는 실용주의적 사고 △영혼이 지친 현대인들이 따뜻한 스킨십을 그리워하는 아날로그적 향수 등을 꼽았다.
리서치 회사 연구원 김혜영(25·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씨는 “풍만함은 곧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라며 “뚱뚱녀 교주 ‘출산드라’가 ‘자연분만 모유 수유’를 주문처럼 외우는데 마른 몸 강박관념에서 탈피해 건강한 모성으로 복귀하자는 경고로 들렸다”고 말했다.
이 같은 문화계의 ‘몸의 반란’은 과연 주류로 떠오를 것인가.
김종엽(사회학) 한신대 교수는 “사회의 주류 담론은 결코 목소리를 높여서 주장하지 않는 법”이라며 “뚱뚱한 사람이 마른 사람을 풍자하는 설정 자체가 이미 날씬함이 우리 사회의 주류가 됐음을 증명하는 것이며, 날씬한 신체에 대한 대중의 열망은 ‘몸의 반란’과 양립하면서 오히려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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