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걷힌 칠월 땡볕에
지렁이가 슬슬 세상을 잰다
시멘트 길을 온몸으로 긴 자국
행서도 아니고 예서도 아닌
초서체로 갈겨쓴 일대기 같다
한평생 초야에 숨어 굴린 화두를
최후로 남긴 한 행 절명시 같다
그 판독이 어려운 일필휘지를
촉새 몇 마리 따라가며 읽는다
혀 짧은 부리로 쿡쿡 쪼아 맛본다
제멋대로 재잘대는 화려한 오독
각설이 지렁이의 몸보다 길다
오죽 답답하고 지루했으면
隱者가 몸소 나와 배밀이 하랴
쉬파리떼 성가신 무더위에
벌겋게 달아오른 肉頭文字로
-시집 ‘시인의 모자’(창작과 비평사) 중에서》
중국 선종의 2대 조사 혜가는 불법을 얻고자 팔 하나를 잘라내었다. 뱀들은 일찍이 ‘사족(四足)’을 잘라내고 ‘사족(蛇足)’이란 고사를 얻으며 삶을 엄혹히 단순화했다. 그러나, 저 붉은 성자에 비하면 아직 멀었다. 독은 대개 두려움의 물증. 저 이는 꼿꼿이 세운 목덜미, 날카로운 독니는커녕 눈마저 귀마저 버렸다. 터럭 하나 없는 알몸이지만 무려 이억만 년 동안이나 지구 생태계를 떠받쳐온 강자다. 성자는, 강자다.
저 벌거숭이 성자가 단단한 시멘트 위에 묽은 체액으로 휘갈겨 쓴 절명시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인간들 때문에 더 이상 말랑말랑 포슬포슬한 생명의 흙똥을 싸는 생업이 곤란해졌다고, 풀꽃을 피우고 들짐승을 키우기는커녕 땅속의 은자들도 숨쉬기 어려워졌다고, 일인시위를 벌인 것은 아니었을까? 결코 촉새처럼 읽고 제멋대로 재잘댈 일 아니라, 저 육두문자를 겸허히 해독해야 할 것이다.
-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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