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은 10대 후반에 이미 작가로서의 천재성을 드러냈다. ‘마장전’ ‘민옹전’ ‘광문자전’ 등 이른바 ‘9전(九傳)’에 해당하는 작품 대부분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전반 사이의 시기에 창작되었다. ‘9전’이 청년 연암의 뜨거운 파토스와 예리한 비판의식, 풋풋한 감수성을 보여준다면, 30대에 쓰여진 산문은 삶과 세계에 대한 더욱 깊은 성찰과 응시를 보여준다.
연암은 이 시기에 지독한 가난과 함께 가까운 가족과의 사별을 경험했으며, 커다란 경륜을 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비판적 자세로 인해 당대의 지배질서 밖에서 소외된 지식인으로서 살아가야 했던 바, 이러한 체험과 역정이 그의 산문에 놀라운 깊이를 가져다 준 것으로 보인다. ‘큰누이 묘지명’이라든가 ‘술에 취하여 운종교를 밟은 일을 기록한 글’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글이다.
한편 연암은 이 시기에 실학적 사고를 발전시켜 갔으며, 춘추대의의 명분에 사로잡혀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라고 깔보면서 ‘자고자대(自高自大·스스로를 최고이며 위대하다고 여기는 태도)’의 미망에 빠져 있었던 당대의 조선 사대부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중국의 선진문명을 배워 조선 백성의 삶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그의 이용후생(利用厚生) 사상이다.
30대에 이룩된 연암의 이런 생각은 40대에 창작된 ‘열하일기’에 아주 잘 구현되어 있다. 연암은 이 ‘열하일기’를 통해 조선 사대부의 허위의식과 편견 및 고루함을 조소하였다. 그렇기는 하나 흔히 오해되고 있듯이 연암이 이 책에서 선진 중국문명 따라 배우기만 역설한 것은 아니다. 연암은 동시에 ‘나’가 아닌 ‘타자’로서의 중국을 정당하게 관찰하고 인식하려는 노력을 이 책의 도처에서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연암은 조선의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주체적 입장에서 중국을 인식하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연암의 산문은 마치 입신의 경지에 든 도공이 빚어 놓은 도자기처럼 물샐틈없이 삼엄한 완정미를 보여준다. 그의 글은 대단히 창의적이며, 풍부한 상상력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인간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반성력과 자기응시를 보여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창조적인 글쓰기를 통해 사회와 현실에 대한 진지한 성찰, 더 나아가 나라와 백성에 대한 선비로서의 경세적 책임감을 견결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연암은 우리나라 고전문학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언어의 마술사였다고 이를 만하다. 연암만큼 언어와 사물의 관계에 대해 집요하게 물으면서 상투성과 진부함 속에 갇혀 있는 언어를 해방시켜 사물 자체에 다가가게 만들려고 노력한 작가도 아마 없을 터이다. 이 점에서 그는 ‘대문호’라고 불릴 만하다.
연암의 산문은 고도의 미학적 정련을 보이고 있어 한글로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 지금까지 나와 있는 번역이나 해석에는 틀린 것이 퍽 많다. 하지만 최근 간행된 신호열 김명호 두 분이 공역한 ‘연암집’만큼은 전적으로 신뢰할 만하다.
박희병 서울대 교수 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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