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과학의 발전에 힘입은 기대는 그뿐 아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보듯 뇌를 컴퓨터에 접속해 어렵게 공부하지 않아도 헬리콥터를 금세 조종할 수 있고 유전자 조작을 통해 아이가 잘생긴 얼굴과 예술적 재능까지 갖고 태어나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이들. 이른바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의 신봉자들이다.
#2 지난해 가을 미국의 격월간 국제정치 전문지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는 세계의 지성으로 손꼽히는 8명에게 ‘인류에게 가장 위협적인 사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사회주의에 대한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선언한 저서 ‘역사의 종언’을 쓴 석학,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 존스홉킨스대 교수의 대답은…. 바로 ‘트랜스휴머니즘’이었다.
#3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 타임스는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한 논란을 최근 주말판에 실으며 이렇게 끝을 맺었다. “생명 공학의 혁명으로 후쿠야마는 우리가 ‘역사의 종언’에 달했다는 주장을 수정하게 됐다. 역사는 계속된다, 과학자에 의해. 이런저런 논란이 있지만 생명공학이 구시대의 질서를 붕괴시키고 새 질서를 창조할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SF 영화에서처럼 ‘트랜스휴머니즘’의 꿈은 이뤄질 것인가? 아니면 완벽한 인간을 창조하려다 실패한 ‘프랑켄슈타인’처럼 인간의 꿈이 혹독한 대가를 불러올지도 모르는 것인가?
○ 인간은 진화 중?
‘세계 트랜스휴머니스트협회(WTA)’ 홈페이지(www.transhumanism.org)에 따르면 트랜스휴머니즘은 ‘현재 인간의 모습은 발달의 끝이 아니며 초기 단계에 해당한다는 전제 아래 과학 기술을 통해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철학’이다. 트랜스휴머니스트인 철학자 닉 보스트롬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는 “트랜스휴머니즘은 휴머니즘(인본주의)의 확장”이라며 “인간과 이성을 중시하는 휴머니즘을 추구하지만, 과학 기술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통해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계발한다는 점이 다르다”고 말한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미래에 나타날 새로운 인간을 ‘포스트휴먼(posthuman)’이라고 부른다. 지금의 천재들보다 훨씬 높은 지능인 ‘슈퍼인텔리전스’를 갖고 있으며 병에 걸리거나 늙지 않으며 항상 활력이 넘치고 피곤함이나 짜증도 느끼지 않는 존재. 한마디로 ‘영생’의 꿈을 실현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들은 인간과 포스트휴먼 사이의 중간 단계를 ‘트랜스휴먼’이라 칭한다. 이란계 미국인 미래학자 F M 2030(트랜스휴머니스트인 그는 100세가 되는 2030년까지 살기 바라며 이름을 바꿨으나 2000년에 사망했다)은 △발달된 의치 의안 의족의 사용 △성형수술 △이동통신기기의 사용 △지구적 라이프스타일 △전통적 가치의 부정 △남녀의 양성(兩性)화 △체외수정을 통한 임신 △종교적 믿음의 소멸 등이 트랜스휴먼의 특징이라고 1989년에 주장했다. 그의 주장들은 오늘날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인류는 과연 ‘포스트휴먼’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 ‘포스트휴먼’은 가능할까
트랜스휴머니즘이 주목받는 이유는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과학 기술에 기반한 주장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인간 게놈 지도 완성(2001년)이후 개별 유전자의 역할을 분석하고 있으며, 이것이 성공하면 유전병이나 암 등 을 예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이 결과를 바탕으로 한 유전자 치료를 통해 인간의 지능이나 성격, 육체적 특징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원자나 분자 등 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급의 극소의 세계에서 물질을 합성 조립 제어하는 ‘나노기술’도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신뢰를 보내는 분야다. 최근 한국의 국가과학기술위원회는 2020년경 ‘나노로봇’이라는 백혈구보다 작은 로봇이 인체를 돌아다니며 병을 고치는 일이 가능하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이에 더해 컴퓨터 프린터가 우리가 원하는 2차원의 화면을 찍어내듯, 나노기술로 만들어진 ‘어셈블러’라는 기계가 3차원의 물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영화같은 주장도 한다.
다이아몬드와 흑연은 탄소로 이뤄져 있지만 원자의 배열이 달라 서로 다른 물질이 됐다. 이같은 속성 때문에 흑연은 인공 다이아몬드의 원료로 사용된다. 이 이론에 따라 나노 기술로 원자의 배열을 바꾸면 어떤 물질이든 만들 수 있다는 게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생각이다.
○ 컴퓨터가 영생을 준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마인드 업(또는 다운)로딩이라 부르는 과정이다. 인간의 뇌에 저장된 기억들을 컴퓨터로 옮겨 놓는 것을 말한다. 이럴 수 있다면 사람이 사고로 기억을 상실해버렸을 때 뇌를 다시 ‘부팅’할 수 있다. 또 인간의 모든 기억과 지식을 ‘백업’해 놓았다가 언제든지 새롭게 재생된 육체에 넣어주면 영원한 삶도 가능하다.
이들은 뇌와 컴퓨터 네트워크를 연결해 생각만으로 e메일을 보내고 머릿속으로 인터넷 서핑을 하는 일도 상상하고 있다. 슈퍼 컴퓨터와 연결된 뇌는 컴퓨터만큼 빨리 작동할 것이고 집중력이나 판단력을 높이는 약이나 소프트웨어의 도움으로 ‘슈퍼인텔리전스’가 구현된다고 이들은 상상한다.
최근 영국 통신회사 브리티시 텔레콤(BT)의 미래학 팀장 이언 피터슨은 “2050년경에는 고도로 발달한 슈퍼 컴퓨터에 인간 뇌에 저장된 기억들을 다운로드시켰다가 새로운 육체에 옮김으로써 죽음이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고 2020년경에는 초인적 지능의 컴퓨터가 나타날 것”이라고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과학은 현재 뇌 속에 칩을 심어 생각만으로 컴퓨터를 작동하는 수준까지 발달했다. 사고로 목 아래 전신이 마비된 미국인 매튜 네이글 씨는 뇌에 심은 전극을 통해 전자 기기를 움직이고 인공 팔과 로봇을 조작하며 살고 있다고 BBC 인터넷판이 4월 보도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해지지 않는 약, 집중력을 높이는 약 등도 이미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짧은 기간 내에 자신들의 꿈이 이뤄지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최대한 오래 살 수 있는 ‘참살이(웰빙)’를 권장하며 기술이 발전할 때까지 냉동 인간이 되는 것도 반대하지 않는다. 현재 그들의 결론은 “가능해질 때까지 오래 살아라”는 것이다.
○ 그러면 ‘인간의 조건’은 무엇인가?
유전학자인 오브리 드 그레이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BBC 인터넷판에서 “노화로 인한 세포 손상과 노화방지에 대해 연구하고 있고 10년 내에 쥐, 다음 10년 내에 인간에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인간은 곧 1000세까지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공중보건학자 S 제이 올샨스키 미국 일리노이대 교수는 “역사상 영생을 추구했던 모든 이들은 다 죽었으며 수많은 과학자들이 예전부터 노화 방지의 꿈이 이뤄진다고 말해왔다”며 “과학의 발달로 생명이 연장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드라마틱한 변화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트랜스휴머니즘의 꿈이 이뤄진다고 해도 생명 윤리의 문제는 인류의 과제로 남는다. 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이창영 신부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며 “그렇게 되기까지 수많은 이들이 실험 대상이 되고 그 과정에서 실패도 있을 텐데 누가 그들의 생명을 책임지겠느냐”고 반문했다.
권력과 부를 거머쥔 이들만 ‘슈퍼인텔리전스’를 가질 수 있을 것이므로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대물림될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특히 이상욱 한양대 철학과 교수는 ‘인간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돼 인간에 대한 개념이 뿌리째 흔들릴 것이라고 지적한다.
“지금은 장애가 있든 병이 있든 똑같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몸속에 온갖 장치를 집어넣고 뇌마저 컴퓨터로 돌아가는 존재는 과연 인간일까요? 그럼 기계의 비율이 50%인 정도까지만 인간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럼 그 이상인 존재는 무엇이겠습니까?”
글=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
그래픽=이진선 기자 geranum@donga.com
▼트랜스휴머니즘과 우생학▼
완벽한 인간을 꿈꾸는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해 우생학의 망령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다. 인류를 개량하려는 목적을 가진 우생학이 히틀러 등에 악용돼 대량 학살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1920, 3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는 유전적으로 열등 인자를 가졌다고 판단된 이들에게 강제로 불임 수술을 시키거나 죽이는 일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 같은 사례는 적극적 우생학에 속한다. 반면 좋은 유전자를 가진 이들이 자식을 더 많이 낳아야 한다는 소극적 우생학도 있었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홈페이지에서 모든 우생학은 ‘반 휴머니즘’이라며 관련성을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유전자 치료나 유전자 재조합은 최근 서구에서 득세하는 자유주의적 우생학과 비슷하다는 지적이 많다. 자유주의적 우생학은 소극적 우생학의 한 종류로 인류의 유전자 중 좋은 것만 남겨 다음 세대를 더 뛰어난 인간으로 만들자는 것.
이상욱 한양대 철학과 교수는 “(트랜스휴머니즘이나 자유주의적 우생학은) 모두의 능력을 향상시키자는 말이므로 언뜻 매력적으로 들리지만 인간의 특성이 유전자와 1:1로 대응되지 않기 때문에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특성은 유전자들의 상호 작용으로 이뤄지며 유전자를 둘러싸고 있는 세포 내 환경을 비롯해 사회적 물리적 환경에도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즉 펑크난 자동차 타이어는 갈아 끼우면 되지만 인간의 유전자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도 인간의 ‘복잡성’과 관련해 트랜스휴머니즘을 비판했다. 그는 “만약 인간에게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면이 없으면 자신을 방어할 수 없을 것이며 질투가 없다면 사랑에 빠지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수백만 년간 진행된 인류의 진화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특성 중 무엇이 좋고 나쁜지 판단하기 어려운데, 도대체 어떤 가치들을 제거하고 어떤 가치들을 발전시켜야 하느냐고 그는 묻는다.
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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