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무게에…인간의 탐욕에…천연기념물 쓸쓸한 퇴장

  • 입력 2005년 6월 23일 03시 02분


《“나무가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된다는 것은 의사로부터 ‘더 이상 가망이 없으니 임종을 준비하라’는 통보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2002년 용주사 회양목이 회생 불능 진단에 따라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됐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 아팠습니다. 꼭 다시 살려보겠다고 마음먹고 달려왔지요. 수술도 하고 영양주사도 놓았더니 놀랍게도 작년부터 살아나더군요. 잎이 나고 수세(樹勢)도 좋아져 모양새를 갖춰 갔습니다. 됐구나 싶었는데 올 4월 들어 갑자기 날씨가 더워지더니 다시 기력이 떨어지고, 이젠 가망이 없습니다.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며 심은 효(孝)의 나무였는데….”》

20일 오후 경기 화성시 용주사의 회양목(옛 천연기념물 264호·수령 200년) 앞. 2002년부터 이 나무를 자발적으로 관리해 온 조경전문가 김영태(金永太·57) 씨는 그동안 병상의 부모 모시듯 간병해 온 나무를 쓰다듬으며 못내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돼 쓸쓸한 최후를 맞는 나무가 적지 않다. 104호인 충북 보은군의 백송(白松·수령 200년)과 353호인 충남 서천군 신송리 곰솔(소나무의 일종·수령 400년)이 다음 달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되는 등 연평균 2건 정도의 나무(또는 군락)가 천연기념물이라는 특권적 지위를 잃는다.

▽왜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될까=대부분 노화나 태풍 낙뢰 등으로 인해 고사(枯死)에 이르지만 사람의 탐욕에 의한 경우도 있다. 2001년 7월, 355호 전북 전주시 삼천동 곰솔(수령 450년)은 뿌리 부분에 누군가 독극물을 집어넣은 것이 확인됐다. 이 곰솔은 후유증이 심각해 지금도 힘겨운 투병을 계속하고 있다. 이 같은 살수(殺樹) 행위는 천연기념물로 인해 건축 제한 등 재산 피해를 받는 사람의 소행인 경우가 많다.

위기를 극복한 경우도 있다. 64호인 울산 울주군 두서면 은행나무(수령 550년)는 원래 물이 많은 논 가운데에 있어 상태가 좋지 않았다. 2003년엔 태풍 때문에 나뭇가지의 3분의 2가 부러지는 사고까지 당했다. 해제가 거론됐지만 철제 빔으로 가지를 받치고 토지를 매입해 논물을 빼냈다. 그 후 서서히 생육이 회복되면서 해제 위기를 넘겼다.

▽해제 이후의 운명=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되면 지원이 끊긴다. 천연기념물 한 개당 1년 평균 관리비는 1억3000만 원(올해 기준)에 달한다.

해제가 예고되거나 결정되면 최후를 준비하게 된다. 다음 달 해제되는 보은 백송은 지난해 5월 이미 고사 판정을 받았던 나무. 지난해 나무껍질을 모두 벗긴 뒤 송진을 발라 방부처리를 해놓았다. 보은군은 일단 예우 차원에서 2년 동안은 나무를 그대로 보존하기로 했다. 그리고 2007년경 나무를 베어내 껍질을 다시 입혀 소나무 홍보 전시관에 전시할 계획이다.

▽천연기념물 복권을 꿈꾸는 후계목들=2001년 고사로 인해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된 전남 신안군 흑산도의 초령목(招靈木·영혼을 부르는 나무) 주변엔 43그루의 후계목이 자생하고 있다. 전남도는 이 후계목들을 지방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천연기념물로의 복권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복권이 쉽지는 않다. 문화재청 천연기념물과 이소연(李昭姸) 씨의 설명.

“후계목이 대를 이어 천연기념물로 지정 받으려면 일단 몇 백 년은 지나야 합니다. 나무도 오래 되어야 하고 나무에 사람들의 체취와 문화가 배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후계목을 키우는 사람들은 오랜 기다림을 마다않는 분들입니다. 이 분들 덕분에 수백 년 뒤에도 더욱 멋진 천연기념물이 살아남지 않을까요.”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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