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사에 묶인 비너스… 반가사유상… 조각가 박승모 첫 개인전

  • 입력 2005년 6월 28일 03시 10분


코멘트
비너스(2004년)
비너스(2004년)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뭔가를 철사로 감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아마 대부분 사람들은 ‘그 사람 제 정신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감는 노동을 예술로 승화시킨 젊은 조각가가 있다.

조각가 박승모(36·사진)는 지루하게 반복되는 철사 감기로 작품을 만든다. 그의 독특한 상상력과 집요한 노동이 빚어 낸 ‘감은 작품’들은 미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사물의 본질’이라는 철학적인 질문들을 던진다.

그는 실제 크기의 그랜드피아노와 콘트라베이스, 길이 15m 카누, 비너스 조각상, 자전거, 흔들의자, 쟁기, 풍로(風爐), 불상(佛像), 불두상(佛頭像) 등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물들을 굵기 2∼8mm짜리 알루미늄 철사로 촘촘히 감아 보자기처럼 ‘덮어버린다’.

전시장에서 만나는 그의 작품들 가운데 반가량은 철사 속에 덮인 게 무엇인지를 도무지 알아챌 수가 없다. 작품 옆 실제 이름을 보고나서야 비로소 ‘아 그렇구나’ 한다.

반가사유상(2004년)

세상의 사물(정확히 말하면, 실물을 그대로 본뜬 합성수지)들은 철사라는 차가운 재료로 포장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다른 물건으로 다시 태어난다. ‘가리기’와 ‘드러내기’의 경계를 깨닫는 것, 이것이 바로 박승모 조각의 묘미다.

“윤곽만 드러나고 안은 감춰진 형상을 보면서 궁금해 하는 관람객들 모습이 재미있습니다. 겉모양만 보고 대상을 판단해 버리는 요즘 세태도 연상되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가 무엇일까 하는 사물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도 하게 됩니다.”

그가 ‘감는 노동’을 예술에 적용해야겠다고 결심한 데는 6년간의 인도 체류가 결정적이었다. 대학 졸업(부산 동아대 조소과) 후 남들처럼 평범한 석조작업을 했던 그는 어느 날, 작업과 삶에 대한 의문으로 더 이상 작업에 몰두할 수 없게 되자, 불현듯 인도행을 결심한다.

인도를 떠돌며 명상수행으로 내면에 침잠했던 그는 자아(에고)와 욕망의 실체와 씨름했다. 점점 작업과는 멀어졌고 ‘출가’를 꿈꾸기도 하는 그런 시간들이 흘러갔다. 그렇게 떠돌다 귀국을 앞둘 즈음, 우연히 카페에 앉아 A4용지 위에 무심히 연필로 동심원을 그어 나가던 그는 어느 순간, 연필 선으로 까맣게 된 종이를 보고 큰 영감을 받는다.

아무 생각이나 의도 없이 무심한 반복작업을 하는 동안, 그는 그토록 자신이 버리고자 했던 ‘에고’를 잊었음을 깨달았고 그런 과정을 작품에 연결시킨다면, 출가와 작업이 다른 길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들었다. 그는 조각가답게 ‘선(線)’을 면과 공간으로 확장했다.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쉽게 구부러지는 알루미늄 철사를 합성수지로 캐스팅한 대상 위에 감는 데 성공한다.

그는 경기 여주군 작업실에서 매일 오전 8시부터 밤 12시 가까이 철사 감는 일을 반복한다. 손가락 길이만큼씩 접착제를 바르고 철사를 붙이는 일은 마치 달팽이가 기어가듯 아주 느린 작업의 결과물이다. “힘들지 않느냐”고 묻자 “잡념이 없어서 좋다. 그런 무아의 상태야말로 내가 그토록 원했던 경지”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작업을 통해 명상수행을 하는 수도자(修道者)처럼 보였다. 이 질주의 시대에 진실하고 느린 그의 노동은 신성해보이기까지 한다. 그의 첫 개인전이 서울 인사동 아트사이드에서 7월 4일까지 열린다. 02-725-1020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