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03>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7월 7일 03시 09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항왕이 구강왕 경포를 두들겨 내쫓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완성(宛城)까지 뒤쫓아 간다면, 그때는 우리도 성을 나가 싸워야할 일이 생길 것입니다. 먼저 섭성(葉城) 주변에 남겨 둔 초나라 군사를 들이쳐 완성에 가있는 항왕을 불러들이게 하고, 그래도 항왕이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도 구강왕이 했던 것처럼 발 빠른 군사를 내어 항왕의 등짝을 후려쳐야 합니다.”

장량의 그 같은 말에 한왕이 문득 떨떠름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그렇게 항왕의 화를 돋우어 섭성으로 불러들였다가 뒷감당은 어찌 하시겠소?”

장량이 태평스레 대답했다.

“힘을 다해 지키면서 또 누군가가 항왕의 등짝을 후려쳐 주기를 기다려야겠지요. 정히 아니 되면, 구강왕에게 다시 항왕의 뒤를 치게 하는 것도 한 계책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항왕으로 하여금 완성과 섭성 사이를 오락가락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상책이요, 항왕에게는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스스로 빠져들게 되는 하책(下策)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패왕 항우는 바로 장량이 말하는 하책을 골라잡았다.

패왕은 몇 년 동안이나 팔다리처럼 부려 온 구강왕 경포가 다른 사람도 아닌 한왕 유방 밑에 들어갔다는 게 참을 수 없었다. 그 아내와 자식을 잡아 죽여 분한 속을 풀었으나, 이제 다시 한왕을 위해 자신의 등 뒤를 찔러오니 그저 되받아쳐 내쫓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이번에는 아예 뿌리를 뽑아버릴 작정으로 경포를 뒤쫓아 완성으로 갔다.

하지만 경포가 지키는 완성도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이틀이나 불같이 들이쳐도 끄덕 없어 패왕이 은근히 조바심을 내고 있는데, 다시 섭성에서 급한 전갈이 왔다. 남아 성을 에워싸고 한왕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로 했던 항장(項壯)이 보낸 전갈이었다.

“한왕 유방이 불시에 군사를 내어 북문 쪽에 있던 우리 본진을 들이쳤습니다. 동 서 남 세 곳의 군사들을 불러 겨우 막아내기는 했습니다만, 여기 남은 군사들만으로는 한왕을 섭성에 가둬놓기 어려울 듯합니다. 자칫하면 전처럼 성을 빠져 나가 두고두고 대왕의 우환거리가 될까 실로 걱정입니다. 대왕께서 어서 섭성으로 돌아오시어 한왕의 일부터 결판을 내시는 게 좋겠습니다.”

달려온 군사로부터 그런 말을 전해 듣고 보니 제성을 못 이겨 완성까지 달려온 패왕도 퍼뜩 정신이 들었다. 말할 것도 없이 패왕에게도 더 급한 것은 한왕 유방을 잡는 일이었다. 이에 패왕은 일껏 에워싼 완성을 버려두고 군사를 섭성으로 되돌렸다. 하지만 경포가 그를 선선히 놓아주지 않아 패왕은 다시 뒤따르던 군사 한 갈래를 잃고서야 완성에서 돌아올 수 있었다.

패왕이 섭성으로 돌아오니 어찌된 셈인지 한왕 유방은 아직도 성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성을 빠져나가 달아날 수 있었는데도 그대로 버티는 게 께름칙했으나, 패왕에게는 그 까닭을 깊이 따져볼 겨를이 없었다. 돌아온 그날부터 다시 전군을 들어 성을 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패왕이 며칠 제대로 힘을 모아 섭성을 들이쳐 보기도 전에 이번에는 동쪽에서 유성마(流星馬)가 날아들었다. 설공(薛公)과 더불어 산동에 남아 팽성의 배후를 지키던 항성(項聲)이 하비(下비)에서 보낸 급보였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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