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06>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7월 11일 03시 04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내일 아침 일찍부터 전군을 들어 형양성 남문과 동문을 치도록 하라. 놀란 한군이 그쪽 성벽 위로 흠뻑 몰려 있을 때, 과인의 대군이 서문과 북문을 일시에 깨뜨려버릴 것이다.”

종리매는 다음날 패왕이 시킨 대로 했다. 군사들에게 새벽같이 밥을 지어먹인 뒤 남문과 동문을 한꺼번에 들이쳤다. 장졸들을 이끌고 역시 새벽 일찍 성고를 떠난 패왕은 형양성을 지키는 한군이 모두 남문과 동문 쪽으로 쏠리기를 기다려 서문과 북문으로 대군을 몰았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패왕의 장졸들이 성벽에 이르기도 전에 성벽 위에서 화살이 비오듯 쏟아졌다. 이어 한군이 성벽 위를 새카맣게 뒤덮더니, 주가(周苛)가 성가퀴로 얼굴을 내밀고 소리쳤다.

“항적(項籍)은 어디 있느냐? 네 천하의 패왕을 자처하면서, 어찌 이리 자잘한 속임수로 나를 이기려 하느냐? 내 벌써 간밤에 소문을 듣고 네가 이리 나올 줄 알았다.”

성고성을 거저 줍다시피한 터라 형양성도 쉽게 얻을 수 있을 줄로 알았던 패왕은 그런 주가의 외침에 뜨끔했다. 하지만 자신의 계책이 들킨 게 부끄럽기보다는 주가의 슬기로운 대처가 너무 간교하게 느껴져 화부터 났다.

“서리 앞둔 풀무치나 여치의 울음소리에 어찌 일일이 대꾸하랴. 여러 말 주고받을 것 없이 쳐라! 모두 힘을 다해 성문을 깨고 성벽을 넘어라. 이번에는 반드시 형양성을 떨어뜨려 저 혀 긴 놈을 가마솥에 삶도록 하자!”

패왕이 그런 외침으로 싸움을 북돋우자 주춤했던 초나라 장졸들이 함성과 함께 형양성 서북쪽 성벽으로 기어올랐다. 하지만 주가의 기세는 말만이 아니었다. 어찌된 셈인지 성벽 위에는 군사들뿐만 아니라,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막을 준비도 전보다 나았다. 성가퀴에는 내던질 통나무와 바윗덩이가 더미 지어 쌓여 있었고, 구름사다리를 밀어내는 장대와 갈고리 달린 긴 창도 숲처럼 세워져 있었다.

성고의 군사와 합력하여 초나라 군사들의 에움을 뚫은 적이 있어서일까, 한군의 사기와 기력도 별로 줄어든 것 같지 않아보였다. 무엇을 믿는 것인지 패왕의 대군을 다시 맞고서도 두려워 떠는 한군은 하나도 없었고, 또 며칠 에움이 풀렸을 때 얼마나 많은 군량을 성안으로 거둬들였는지는 모르지만 주린 기색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흔들림 없기는 종공과 한왕(韓王) 신(信)이 지키는 동남쪽도 마찬가지였다. 종리매가 이끄는 군사가 그리 적지 않았으나 그 절반도 안 되는 군사로 잘 막아냈다. 전날 성고성에서 달아난 한군 가운데 몇이 그리로 숨어들어 미리 알려준 덕분인 듯했다.

첫날 아무 것도 얻은 것 없이 군사만 상한 패왕은 다음날 종리매와 합쳐 성 한쪽만 들이쳐 보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성안의 전력도 그곳으로 집중되어 초군의 공세를 잘 막아냈다. 그리고 그 뒤 며칠 불같은 공방을 주고받은 뒤 형양성의 싸움은 차츰 전과 같이 지루한 공성전(攻城戰)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패왕이 아무리 이를 갈며 끝을 보려 해도 이번에는 오래 형양성을 에워싸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다시 형양성을 에워싼 지 닷새도 되기 전에 항성(項聲)이 하비(下비)에서 보낸 급보가 날아들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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