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권장도서 100권]<88>오이디푸스 왕外-소포클레스등

  • 입력 2005년 7월 15일 03시 10분


그리스 비극은 세계 어디서든 ‘만년 히트작’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그야말로 엽기적이다. 아버지를 때려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하는 아들, 아들을 맨손으로 갈가리 찢어 죽이는 어머니 등 그리스 비극은 사회적 인습과 제도가 송두리째 파괴된 세계를 보여 준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인은 왜 이런 끔찍한 얘기를 즐겼을까? 이 모진 얘기들이 아직도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왜 그리스 비극인가?

그리스 비극은 페르시아,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잇달아 치르면서 ‘그리스의 기적’을 이룬 기원전 5세기 아테네 민주정의 역사와 분리될 수 없다. 아테네 디오니소스제에서 상연된 그리스 비극은 시민들이 서로 자신과 자기 사회에 대해 논하는 장이었다. 그러나 아테네인이 무대에 올려 함께 구경한 세계는 그들의 조국이 아닌 ‘타자’의 세계였다. 그리스 비극은 거의 모두 영웅시대를 배경으로, 다른 도시국가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룬다.

오이디푸스의 얘기는 테베, 오레스테스의 얘기는 아르고스, 메데이아의 얘기는 코린트에서 펼쳐진다. 타자의 비극적 세계는 아테네인에게 자기 문명의 우월성을 말해주는 동시에 조국을 잃으면 그들에게도 어떤 재난이 닥칠지 모른다고 경고했을 것이다. 결국 그리스 비극은 아테네인이 자신의 행운을 자축하고 바깥 세계의 야만적 어둠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다지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비극이 자기 찬양과 자기 무장만을 설교했다면 만년 히트작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스 비극의 위대함은 시민교육이라는 역사적 테두리를 벗어나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는 데 있다. 그리스 비극은 국가 수호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순간에도 국가주의의 모순을 폭로하며, 국가와 가족의 요구가 상충할 때 전자를 따르는 게 얼마나 어렵고 도덕적으로 위험한지 보여준다. ‘부동의 신념’이나 영웅주의에 감춰진 독선과 국가주의의 허구성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다. 이피게네이아가 아버지 아가멤논의 명예욕에 제물로 바쳐지는 것을 보면서 아테네 시민은 전쟁과 폭력이 애국심이나 희생의 논리로 둔갑하는 과정을 목도하고 영웅주의의 비겁하고 기회주의적인 얼굴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스 비극은 우리가 당장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려 할 때조차 ‘나는 누구이며 인간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니체가 지적하듯 그리스 비극은 관중으로 하여금 인간이란 노쇠와 죽음의 운명을 타고났을 뿐 아니라 비이성적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임을 새삼 깨닫고 통곡하게 하는 통찰의 순간을 담는다. 이 순간을 통해 관중은 인간 존재의 진실과 대면하고, 그 대면의 고통을 받아들임으로써 필멸의 존재인 자신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 비극이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던지는 엄중한 질문인 ‘너는 누구인가’야말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이디푸스와 이피게네이아의 격렬한 비극이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들을 ‘통곡’의 순간으로 이끄는 이유라 해도 좋을 듯하다.

추천된 천병희 번역본은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그리스 원전에 의거한 번역이지만, 아직 전작 번역이 끝나지 않았으며 이미 나온 번역도 원문에 충실하면서 우리글로서도 잘 읽히는지에 대해서는 평이 엇갈린다.

이종숙 서울대 교수 영어영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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