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엔드 포커스]그가 말을 하면… 어록이 된다

  • 입력 2005년 7월 15일 08시 45분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겐 조국이 있다.”(황우석 서울대 교수) “연기는 진실과 거짓의 아름다운 조화입니다. 물론 연기 자체는 거짓이죠. 하지만 거짓인 체로 하면 연기가 안돼요.” (배우 문근영)

인터넷에서 유명인들의 말이 ‘000 어록’으로 불리며 회자되고 있다. 예전에는 이순신 장군이나 김구 선생 등 위인들의 말이 어록으로 불렸지만, 요즘은 만인 어록 시대를 방불케 한다.

그 내용도 일상에서 공감을 자아내는 것들이 많고 발언자를 비난하기 위한 것도 있다.

어록의 생산과 확산 방식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영웅이나 위인의 추종자들이 어록을 만들어 일부러 유포시키는 ‘톱 다운(Top-down)’ 방식인데 비해, 인터넷 시대에는 대중이 유명인의 말을 모아 퍼뜨리는 ‘보텀 업(Bottom-up)’ 방식으로 어록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어록 열풍은 특히 인터넷을 통해 유명인들의 발언이 여과없이 전해지고, 블로그를 통해 급속도로 확산되는데서 비롯된다. 만인이 어록의 주인공뿐만 아니라 어록의 피해자도 될 수 있는 시대다.》

○ 올해 상반기 최고는 황우석 어록

황우석 교수의 어록은 올해 상반기 최고로 손꼽힌다.

“세계 생명공학의 고지 위에 태극기를 꽂고 돌아온 기분” “문을 열다보니까 경험과 기술이 생겨 4개의 문을 한꺼번에 열었다. 그러고 나니 사립문이 또 있다.” “줄기세포 쓰나미가 몰아칠 것이다” 등 그의 어록은 참신한 비유로 가득하다. 그는 주의를 집중시킬 만한 단어를 한 개씩 골라 비유하되 초점을 흐리지 않는다. 이공계 전문가들은 대중이 이해하기 어려운 ‘그들만의 언어’로 말하는 경향이 있는데 황 교수는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한다는 평을 듣는다.

인터넷에서 가장 널리 퍼지는 게 연예인 어록이다. 최근에 유행한 문근영 어록은 여고생답지 않게 생각이 깊은 ‘애늙은이’같은 일면을 보여준다. 에릭 어록은 “고슴도치의 등을 갈라보면 밤이 나온다” 등 엉뚱한 내용으로 ‘4차원에서 온 에릭’이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연예인 어록의 원조로 불리는 김제동 어록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낯익은 말과 재치로 주목받았다.

TV 드라마 속의 어록은 주인공의 이미지와 중첩돼 강한 파급력을 지닌다. 최근 MBC ‘내 이름은 김삼순’의 주인공 삼순이의 어록이 대표적인 사례. “백수라고? 그게 내 잘못이야? 경제죽인 놈들 다 나오라고 해” “추억은 추억일 뿐이에요. 추억은 아무 힘도 없다고요.”

문화평론가 김종휘 씨는 예쁘지도 날씬하지도 않은 노처녀 삼순이의 솔직한 대사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를 “몸짱 얼짱 신드롬의 반대급부”라고 해석했다.

○ 권위를 잃은 정치인 어록

대통령의 어록은 통치 철학의 반영으로 특정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는 게 많았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로 반공을, 박정희 전 대통령은 “중단하는 자는 승리하지 못하며 승리하는 자는 중단하지 않는다”는 말로 멈추지 않는 경제 성장을 강조했다.

정치인 어록이 유머의 대상이 된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 때. 그는 “세종대왕은 우리나라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임금)이었다” “나는 공작정치의 노예(피해자)였다” 등 말 실수를 여러 차례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연장을 잘 버릴 줄 알아야 최고의 목수”라는 말 등 적절한 비유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죠?” “대통령직을 못해먹겠다는 위기감이 든다”는 등 지나치게 솔직한 말로 국민에게 각인됐다. 한나라당 전여옥 대변인은 노 대통령을 겨냥해 “미숙아는 인큐베이터에서 키운 뒤에 나와야 한다” 등 공격적인 발언으로 논란을 낳았다.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 씨는 “두 사람의 어록만을 놓고 보면, 자기의 주장이 옳다고 믿으며 비판을 잘 참지 못하는 자기애적 성격과 공격성 등 여러 공통점이 발견된다”고 말했다.

연예인들의 말이 비난성 어록 리스트에 올라가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그리스 올림픽 중계 때 “그리스는 왜 새벽에 축구를 하죠”라고 물었던 가수 윤은혜 어록, “술은 마셨지만 음주 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말로 “결혼은 했지만 유부남은 아니다”는 패러디를 낳았던 ‘클릭비’의 김상혁 어록이 그런 사례다.

○ 어록을 통한 이미지의 고착화

하지현 씨는 “위정자나 성인의 어록은 추종자들이 그것을 모으거나, 직접 한 말이 아니더라도 성인의 뜻을 잘 담고 있는 문구를 만들어 대중에게 퍼뜨림으로써 리더십을 실현시키는 도구였다”고 말했다. 이는 ‘톱 다운’ 방식의 어록 유포다.

그러나 인터넷 시대의 어록 생산 방식은 ‘보텀 업’이다. 대중이 스스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이의 말을 모으고 여기에 다른 이들이 덧붙이면서 해당 인물의 이미지가 또렷해진다는 것이다.

문근영 어록에는 우호적인 말들만 있는 반면 문희준 어록에는 “절 아티스트라 불러주세요” 등 그를 희화화 하는 말들이 대부분. 이는 댄스그룹 ‘H.O.T.’ 출신인 그가 록을 한다는 것에 대한 반감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문희준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인터넷 시대 한번 생성된 어록은 곧 자신의 이미지가 된다. 문화평론가 김종휘 씨는 “개인 미디어가 곧 다중 미디어 환경을 조성하는데다 한국사회에서 억압돼온 개인의 발언욕구가 가세하면서 만인의 어록시대가 됐다”고 진단했다.

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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