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연정(聯政) 공론화 발언으로 향후 정계 개편과 개헌 문제의 연계 가능성이 제기되는 상황이어서 이날 행사가 정치권과의 일정한 교감 아래 이뤄지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 어린 시선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 행사가 최근의 여권 움직임에 발맞춰 급조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이날 논문을 발표한 홍윤기(철학) 동국대 교수, 박명림(정치학) 연세대 교수 등은 1년여 전부터 이 문제를 준비해 왔다. 이들은 9차례 개정된 헌법 조문을 꼼꼼히 읽고 유럽연합(EU)과 스위스 헌법까지 분석했다고 한다.
발표자들은 1987년 민주화의 성과인 현행 헌법이 정작 그 민주화의 주체인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현행 헌법이 통치의 대상으로서 국민을 바라보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정치권의 개헌 논의가 권력구조 개편에 초점을 맞춘 것도 비판했다.
특히 박 교수는 “1987년 헌법 개정은 시민사회를 배제한 채 정치엘리트 사이의 막후 거래로 이뤄졌다”며 “이번에는 권력 구조만 뜯어고치는 헌법 개정이 아니라 시민적 합의가 반영되는 헌법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통령 탄핵 사태와 수도 이전 문제에서 보듯 헌법은 이제 저 높은 곳에 장식된 정치적 상징물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규정하는 구체적 잣대가 됐다. 따라서 (만약 개헌 논의가 필요하다면) 그 과정에 시민들의 적극적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주최 측이 의도했든 아니든, 이날 행사는 단순한 학술행사에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 행사를 비롯한 진보진영 학자들의 개헌 관련 움직임은 현재 잠복해 있는 정치권의 개헌 논의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주최 측이 이날 행사의 중심에서 헌법학자들을 배제한 채 진보진영 위주로만 끌고 간 점은 아쉽다. 헌법학자로 유일하게 토론자로 참석한 이국운 한동대 교수도 “수많은 세월을 거치며 우리 헌법에 담긴 층층의 고민을 읽어내지 못한 채 술자리에서 떠들 듯이 섣불리 말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날 발제자들은 “100년을 갈 수 있는 헌법을 만들자”고 말했다. 그러나 헌법이 시대적 변화상을 담아내지 못하며, 헌법전문에 특정 역사사건이 빠졌다고 비판한다면 헌법은 계속 뜯어고쳐야 한다. 또 현재의 이념적 대립 상황에서 헌법에 새로운 가치를 추가해야 한다는 주장은 자칫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이 교수의 말처럼 헌법이 한국이라는 공동체 구성원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같음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가치의 최대치가 아니라 그 최소치가 돼야 하는 것 아닐까.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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