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다,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은!
신비는 결코 그대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대의 모습 뒤에, 그대의 언어 아래, 그대의 생각 속에 또 다른 침묵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그 고요한 우주는 자신의 메아리를 찾고 있다. 알려지지 않은 세계는 그대 안에 자신을 비추기를 원한다. 그대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그 세계의 소식을 전해줄 수 없다.
그대의 저 깊은 곳에 있는 영혼의 산(山)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
그대는 혹 ‘언어의 소음’ 때문에 우리가 세상이라고 부르는 곳에 갇혀 있지는 않은가. 그대가 겉으로 보이는 바깥 세상에 중독되어 있다면, 그대의 내면세계는 유령처럼 느껴질 것이다.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이 밝고 가느다란 띠. 그 시간은 불안한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색깔에 현혹되지만 그것은 ‘빛의 상처’다. “시간이란 존재의 ‘물집’과 같은 것이다….”
이 책은 2000여 년 전 유럽 대륙에서 부족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유럽의 인디언’ 켈트족이 전하는 영혼과 침묵의 시다.
바람과 파도를 집 삼으며 사슴보다 날래고 땅의 정령보다도 지혜로웠다는 켈트족. 대지에 뿌리내린 삶의 방식과 자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는 켈트 문화는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 유럽의 중심문화였다.
아일랜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시인이자 철학자인 저자는 오랫동안 신비주의의 그늘에 가려 왔던 그들 삶의 지혜를 명상과 잠언의 그물에 건져 올린다.
켈트족은 죽은 사람을 묻을 때 네모난 뗏장의 세 면을 반듯이 자른다. 땅의 표면에서 뗏장을 완전히 떼어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말아 올린다. 그런 다음 땅 속으로 관을 내리고 흙을 채워 넣는다. 그러고는 열린 부분과 정확히 일치하도록 뗏장을 펴서 다시 무덤을 덮는다.
그것은 ‘반대로 하는 제왕절개’와 같다! 세상으로 여행을 떠났던 인간을 땅의 자궁이 다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죽음이 찾아왔을 때 영혼은 자기 존재의 둥지, 우주의 가장 큰 가슴으로 돌아간다.
죽음은 삶에서 가장 강렬하고 궁극적인 경험이지만 우리는 한사코 그 존재를 부인한다. 오늘날 죽음은 구석으로 밀려나 있다. 그러나 죽음은 삶의 가장 깊은 본성과 만나는 일이다.
중세의 한 신비주의자가 물었다. 촛불이 꺼질 때 빛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 빛은 새로운 지평선을 향해 길을 떠난다. 죽음은 우리 생의 마지막 지평선이다. “지평선은 우리가 찾아가는 어떤 것이자, 우리와 함께 여행하는 어떤 것이다.”
그 너머에는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샘이 기다리고 있다. 그 샘에서 그대는 영원의 그물에 걸린 그대의 얼굴을 보리라….
원제 ‘ANAM CARA’(1997년).
이기우 문화전문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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