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밤 서울 종로구 인사동 동일빌딩 7층에 위치한 철학아카데미. 우연의 일치일까. 기자가 지난주 찾았던 인사동 문예아카데미 강의실처럼 여기도 에어컨이 갑자기 고장났다. 하지만 30여 명의 수강생들은 고장 난 에어컨을 원망하는 것도 잊은 채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과 무를 먹는 것의 차이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이들을 고민에 빠뜨린 주인공은 ‘슬로베니아의 기적’으로 불리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에 대한 탁월한 해석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민승기(44) 경희대 영어학부 겸임교수다. 그는 영문학자이지만 철학이론과 정신분석학에 대한 탄탄한 실력과 이를 각종 예술작품에 접목시키는 탁월한 응용력으로 철학아카데미의 신예 명강사로 각광받고 있다.
그는 지난해 말부터 ‘지젝 읽기’라는 제목으로 지젝의 대표작을 강독해가고 있다.
올여름 강연주제는 이 코스의 4번째 책으로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헤겔 철학을 접목시킨, 지젝의 작품 중에서도 제목만큼 까다롭기로 유명한 ‘까다로운 주체’.
“지젝은 주체와 세계는 ‘uncanny’(‘뭔가 불안하게 기괴한’이란 뜻의 영어단어)하게, 즉 ‘낯설고도 친밀한 방식으로’ 연결돼 있다고 설명합니다. 칸트는 주체와 세계의 이런 관계를 열어젖혔다가 서둘러 닫았지만 헤겔은 이를 다시 열어젖히고 끝까지 밀어붙였습니다. 그것은 주체가 세계에 의존을 하는 친밀한 관계로 맺어진 동시에 세계의 존립 근거를 뒤흔드는 낯선 관계로 맺어져 있음을 말합니다.”
헤겔은 세계(보편성)는 구체성의 합(合)일 뿐 아니라, 바로 세계를 지시하는 순수형식(내용 없는 빈 공간)을 포함한다고 설명했다. 즉 전체(whole)는 전체뿐만 아니라 빈 공간(hole)이란 잉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성경의 창세기에 따르면 신은 세계를 7일간 창조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신이 뭔가를 창조한 것은 6일이었고 7일째는 휴식을 취했습니다. 그럼 신이 7일째 창조한 것이 뭐죠. 바로 무(無)입니다.”
지젝은 이 무를 라캉의 ‘죽음 충동’(death drive) 또는 ‘오브제 아(objet a)’와 연결시킨다. 라캉은 내 속에 있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분열되고 결핍된 그 무엇을 죽음 충동으로 설명했다. 또 암세포처럼 내 속에서 만들어졌지만 내 것이 아닌 그 무엇을 ‘오브제 아’라고 풀이했다. 지젝은 이것을 세계의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주체, 즉 무(無)라고 말한다.
따라서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부정이지만 무를 먹는다는 것은 세계의 근원적 결핍을 드러내는 긍정성을 띤다. 민 교수에 따르면 영화 ‘양들의 침묵’의 살인마 한니발 렉터의 식인행위도 무를 먹는 행위다. 그에게 인육은 순수물질도 상징물질도 아닌 욕망의 대상물질인 ‘오브제 아’이기 때문이다.
최고령 수강생인 박희상(69) 씨는 “교직에 있다 2000년 명예퇴직한 뒤 철학아카데미 전 강좌를 빠짐없이 수강하고 있는데 이 강좌가 특히 생동감 넘치면서도 구체적”이라고 평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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