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의 전략은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에피소드들을 촘촘히 배치해 관객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화면(혹은 스텔스기)이 갖는 압도적인 스피드와 시각효과, 그리고 강력한 상상력으로 관객의 뇌기능을 아예 정지시켜 버리는 데 있다.
스텔스기 3대로 이뤄진 ‘테론’ 편대에 3명의 남녀 파일럿이 선발된다. 리더인 벤(조시 루커스)과 벤이 사랑하는 여성 카라(제시카 비엘), 그리고 신중한 헨리(제이미 폭스)가 그들. 최고 실력을 자랑하던 이들에게 어느 날 새로운 편대원이 추가 투입된다. ‘그’는 바로 최첨단 인공지능을 가진 무인 스텔스기인 ‘에디’. 갑자기 인공지능 회로에 문제가 생기면서 통제 불능이 된 ‘에디’는 러시아를 폭격하기 위해 쏜살같이 날아가고, 3명의 편대원은 ‘에디’를 막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건 카메라의 운동감이다. 카메라의 운동은 판에 박힌 내용의 이 영화를 꿈틀거리게 만드는 내러티브, 그 자체다. 카메라는 스텔스기의 조종석 바로 1m 위에서 달라붙듯 따라가면서, 변화무쌍한 기체의 움직임을 구토가 나올 만큼 역동적으로 잡아낸다. 대기권 끄트머리에서 1초 만에 지상의 빌딩까지 쓱 내려오거나, 스텔스 기체를 유혹적으로 훑다가 갑자기 쑥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복잡한 전자회로를 클로즈업하는, 서커스에 가까운 카메라 워크는 마치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는 것 같은 독특한 시각 체험을 관객에게 안겨 준다. 헨리의 스텔스기가 전속력으로 수직 하강하면서 테러리스트들이 모인 빌딩의 옥상 한복판에 내파폭탄을 꽂아 넣는 장면은 가능과 불가능을 생각하기 전에 일단 굉장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애당초부터 이 영화를 ‘즐기지’ 않고 ‘뜯어본다’고 작심한다면, 무척 미국적인 이 영화가 ‘아시아의 한 소국’에 사는 당신의 심기를 건드릴지도 모르겠다. 테러리스트라고 그들이 찍으면 미얀마든 타지키스탄이든 스텔스기가 당장 날아가 (민간인이 희생될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상투적인 망설임 끝에) 폭격해 초토화하는가 하면, 아시아의 한 ‘엉뚱한’ 나라에 불시착한 동료 파일럿을 구하기 위해 제 멋대로 국경을 넘어 들어가 불바다로 만들어도 된다는 이 영화의 태도는 불학무식하다. 심지어 무인 스텔스기는 ‘인터넷에서 스스로 내려받은’ 미국 록 음악을 요란하게 틀어놓은 채 융단폭격을 ‘즐기니’ 말이다! 근데, 더 큰 문제는 1억3000만 달러(약 1300억 원)의 제작비가 들어간 이 무지막지한 영화를 보는 순간 아무 생각 없이 신나고 통쾌해진다는 거다.
사실 기고만장한 이 영화의 태도보다 더 미국적인 건 바로 여배우 제시카 비엘의 비주얼이다. 마치 단단한 엉덩이로 젖가슴을 바꿔치기한 듯한 그녀의 압도적인 상체와 웬만한 여자 허벅지 굵기의 근육질 팔뚝이 이뤄내는, 섹시하기보다는 강력한 그녀의 몸은 그 자체가 미국이다.(어쩌면 그녀가 최근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 ‘블레이드 3’ 등에 연달아 출연하며 급부상하는 것도 9·11테러의 후유증(?)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사실은 국내에 이 영화의 원본이 아닌 ‘한국용 특별판’이 상영된다는 점. 당초 북한에 불시착한 카라를 구하기 위해 벤의 스텔스기가 북한군을 맹공하는 내용이 담겼으나, 이 영화의 국내 직배사인 소니픽쳐스릴리징코리아 측이 ‘최근 조성되는 남북한 화해 무드를 불필요하게 자극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미국 본사에 한국 상영을 위한 재 편집판을 요청한 것. 이에 따라 ‘한국판’에는 원판과 달리 북한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대사나 표시가 등장하지 않는다.
‘분노의 질주’ ‘트리플 엑스’의 롭 코언 감독. 28일 개봉. 12세 이상.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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