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한 감수성이 돋보이는 여성 작가 이신조(31) 씨의 두 번째 단편집. 그는 1998년 데뷔해 이미 장편도 두 권 낸 바 있어 가장 성실한 신진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이 단편집은 “내가 누군지 알 때까지 길에서 멈추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는 젊은 여성들의 초상화를 담고 있다. 그 초상화 속에는 세상을 보는 긍정과 부정, 낙관과 비관, 삶과 죽음이 물과 흙으로 빚은 그릇처럼 섞여 있다. ‘중매의 즐거움’은 이렇게 시작한다. “희망. 희망은 존재한다. 그러나 존재해봤자 부질없기 일쑤다. 고통과 절망의 순간, 희망은 치료제라기보다는 진통제다.”
지독하게 낙담한 젊은 여성이 곧장 가서 부딪힌 죽음을 다룬 단편들이 ‘길의 레슨’과 ‘새로운 천사’다. 온 가족이 교통사고로 숨지자 보상금으로 차를 사서 속도에 몸을 내맡기는 불나방이 ‘길의 레슨’에 날아다닌다.
‘미혹’과 ‘카드의 여왕’은 가장 재미있는 단편들이다. 멜로드라마 같은 속성이 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삶을 긍정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어머니를 거둬 간 뒤에도 둥근 배를 안고 스스로를 진정시키는 임신부, 무대에서 객석을 압도하는 여성 마술사가 거기 있다.
얼음 속에 결빙된 횃불. 희망과 비관이 함께 정지한 풍경이 이 단편집의 세계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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