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27>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8월 4일 03시 11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과인은 그렇게 이 성을 빠져나간다 치자. 남아 있는 공들은 어찌하겠는가?”

한왕이 그렇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장량이 가만히 웃으며 대답했다.

“대왕께서 무사히 빠져나가신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저희들에게는 따로 몸을 보전할 방책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진평도 옆에서 거들었다.

“저희들은 모두 항왕을 가까이에서 섬겨본 적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항왕의 불같은 성정은 미워하는 적을 만나면 무섭게 타오르지만, 그 적이 없어지고 나면 어이없이 사그라지고 맙니다. 따라서 대왕께서 성안에 계시지 않음을 알게 되면 그 맹렬한 전투력은 절반으로 줄어, 주가와 종공을 사로잡기 위해 형양성을 칠 때와는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며칠 힘을 다해 버틴 뒤에 틈을 보아 하나 둘 가만히 몸을 빼내면 저희뿐만 아니라 다른 장수들도 얼마든지 이 성에서 빠져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한왕도 조금은 걱정이 줄었다. 그러나 홀로 달아나기에는 아직도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장량이 그런 한왕의 마음을 읽었는지 한층 여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왕께서 어디로 가 계시든 열흘 안으로 반드시 찾아가겠습니다. 기한을 어기면 군령으로 다스려도 대왕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장량의 그 같은 말에 한왕도 드디어 마음을 정했다.

“좋소. 과인은 오늘 밤 옥문(玉門)을 나가 관중으로 돌아가겠소. 소하에게서 군사를 얻어 다시 동쪽으로 나올 것인즉 공들도 너무 오래 날을 끌지 말고 과인을 따르도록 하시오.”

그리고 그날 밤 날이 어둡기 바쁘게 옥문으로 빠져나갔다. 남은 장수들이 동, 서, 남 세 성문에서 금세라도 밖으로 치고 나갈 듯 소란을 떨기 시작한 때였다.

하후영은 성안에서 가장 빠르고 튼튼한 말 네 마리를 골라 발굽을 헝겊으로 싸매고 낮부터 따로 손질해 둔 수레에 묶었다. 달리는 데 꼭 필요한 뼈대만 남긴 가볍고도 단단한 수레였는데, 바퀴에는 잔뜩 기름을 쳐 구르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 수레에 전포만 걸친 한왕을 태우고 가만히 북문으로 빠져나간 하후영은 관도에 올라서기 바쁘게 말을 채찍질했다.

아무리 말발굽을 헝겊으로 싸매고 수레바퀴에 기름칠을 해도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가 내닫는데 소리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곧 북문 쪽을 지키고 있던 초나라 군사들이 듣고 기마대를 내어 쫓았다. 곧 어두운 관도 위에서 하후영이 모는 수레와 초군 기마대 사이에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원래는 수레 쪽이 어림없을 추격전이었다. 하지만 수레를 모는 하후영은 패현 마구간에서 잔뼈가 굵어, 옛적 조보(造父)와 견줄 만큼 말과 수레에 밝은 사람이었다. 일찍이 패현의 사어(司御)가 되었고, 그 수레 모는 솜씨 덕분에 현령리(縣令吏)로 중용되기도 했다.

거기다가 한왕 유방을 따라나선 뒤로 하후영의 수레 모는 솜씨는 한층 날래고도 빈틈없어졌다. 태복(太僕)이 되어 한왕의 수레를 몰면서 수많은 위기를 뚫고 나갔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홀로 싸움수레[전거]를 몰고 빠르게 싸움터를 내달리면서 눈부신 공을 세우기도 했다.

하후영이 워낙 빨리 수레를 몰아 추격을 벗어나니, 얼마간 뒤쫓던 초군 기마대는 처음부터 잘못 들은 걸로 알고 저희 군중으로 돌아가 버렸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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