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아오이 가든’… 엽기적 종말의 묵시록

  • 입력 2005년 8월 6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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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 씨. 작품집 ‘아오이 가든’의 기괴한 공간들과는 달리 매미 소리 쟁쟁한 서울 중구 정동의 성공회 성당에서 사진 찍기를 원했다. 신원건 기자
편혜영 씨. 작품집 ‘아오이 가든’의 기괴한 공간들과는 달리 매미 소리 쟁쟁한 서울 중구 정동의 성공회 성당에서 사진 찍기를 원했다. 신원건 기자
◇아오이 가든/편혜영 지음/266쪽·9000원·문학과지성사

“시체는 왕피천 동쪽 끝자락에서 떠올랐다.”(‘문득’) “여학생의 옷이 최초로 발견된 곳은 저수지 뒤쪽의 숲이었다.”(‘저수지’) “전화가 걸려온 것은 아내가 실종된 지 한 달가량 지나서였다.”(‘시체들’)

신진 작가 편혜영(33) 씨의 첫 작품집 ‘아오이 가든’에 들어 있는 몇몇 단편들의 첫 문장들이다. ‘아오이 가든’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나온 여러 작품집 가운데 가장 강한 개성을 가진 것 중의 하나로 꼽힐 만하다. 작품집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들은 구더기 역병 송장 내장 박제 악취처럼 자꾸 떠올리면 피로와 전율이 몰려오는 어휘들로 둘러싸여 있다. 이 작품집의 공간은 기괴하면서도 환상적으로 현대의 종말을 보여 주는 묵시록의 세계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작품을 들라면 ‘저수지’다. 사람들이 저수지 근처에서 자꾸 실종되자 경찰은 대형 양수기로 저수지의 물을 퍼낸다. 저수지 근처의 낡은 방갈로에는 어린 삼형제가 부모 없이 살고 있는데 저수지에 구렁이처럼 긴 괴물이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저수지의 물을 퍼낼수록 나타나는 건 산더미만 한 쓰레기와 악취뿐이다. 과연 아이들이 본 건 괴물이 맞는 걸까? 괴물이 실종자들을 거둬 가버린 게 사실일까?

편 씨는 “추리소설이나 수사 논픽션을 즐겨 읽기는 하지만 그런 영향을 받아서 글을 쓰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사실 그의 작품들은 인과를 따지는 추리소설보다는 은유와 이미지가 강한 엽기적 성인 동화에 가깝다.

타이틀 작품인 ‘아오이 가든’은 살인적인 역병이 도는 도시의 아파트인 ‘아오이 가든’의 좁은 방에 남은 남매의 이야기다. 이 음산하고 비현실적인 아파트에서는 주민들이 거의 소개해 버리고, 시커먼 개구리들만이 비에 섞여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편 씨는 “몇 년 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이 세상에 퍼져나갈 때 홍콩에서 사스 진원지로 꼽힌 아파트가 ‘아오이 아파트’였다”고 말했다. “그 무렵 배우 장궈룽이 숨졌는데 검은 옷을 입고 조문 온 사람들이 너나없이 하얀 마스크를 하고 있어 눈에 선연하게 남아 있다”고 말했다.

편 씨의 단편들에는 딱히 지금 한국의 현실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익명에 가까운 인물들이 나온다. 이름 없이 그냥 ‘첫째’ ‘둘째’ ‘셋째’로만 나오기도 한다. 자정의 박람회장, 인적 없는 숲, 음산한 계곡, 적요한 소각장 같은 배경들 역시 국적을 알 수 없다. 악몽과 쓰레기, 그리고 악취가 넘쳐난다는 점에서만 서로 비슷할 뿐이다. ‘아오이 가든’이 그려낸 것은 회복이 불가능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편 씨는 이 디스토피아의 독자들을 피리 소리로 유혹해 저 어두컴컴한 다리 넘어 환상의 세계로 몰아가고 싶은 것이다.

“나는 복부 깊은 곳에서 소리를 끌어 올린다. 소리를 모아 천천히 휘파람을 분다. (…) 휘파람 소리에 취한 그들은 무리 지어 나를 따른다. 적도에서 남북극까지, 툰드라지대에서 사막까지, 시골에서 대도시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에 퍼져 있던 쥐들이 모두 나타난다. 그들이 뒷발을 힘차게 차며 앞으로 달려나간다. 그들의 몸이 허공에 길게 아치를 그린다.”(‘마술피리’)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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