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8시 15분. 섬광과 함께 히로시마 중심 반경 1km 이내의 생명체들이 문자 그대로 증발해 버렸다. 이어 m²당 7t의 충격파가 시속 320km의 속도로 훨씬 넓은 지역의 건물과 인간을 후려치며 사지를 찢어놓았다.
30분 뒤엔 후폭풍이 밀어닥쳐 남은 도시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이윽고 낙진을 포함한 ‘검은 비’가 내려 그때까지도 목숨이 붙어 있던 생명체들에게 지워지지 않을 방사능 세례를 안겼다. 현장에서 즉사한 사람만 8만 명. 이후 몇 달 동안 비슷한 수의 사람들이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었다.
정확히 60년 전인 1945년 8월 6일의 일이었다. 왜 미국은 독일을 제외하고 일본에만 이 가혹한 선물을 안겼을까. ‘인종주의의 소산’은 아니었다. 원폭 개발팀은 투하 3주 전인 7월 16일에야 비로소 첫 핵실험에 성공했다. 늦어도 8월 8일이면 소련이 극동 전선에 참전하기로 밀약이 되어 있었다. 촌각을 다투는 ‘시간과의 싸움’이 있었던 것이다.
너무 늦지 않은 시점에 극적으로 완성된 원자폭탄은 ‘안정성’과는 거리가 먼 물건이었다. 인류 최초의 핵실험을 위해 뉴멕시코의 사막에 옮겨진 뒤에도 개발팀은 기폭장치가 벼락을 맞아 오작동할 수 있다는 악몽에 마음을 졸였다. 원폭 투하를 수행할 티니언 섬의 509 혼성대대는 ‘도깨비 부대’였다. 다른 부대원들은 출격은 안 하면서 고급 위스키와 전용 극장으로 호사를 누리고 있는 이들을 질투해 막사에 돌을 집어던지기 일쑤였다. 일본 첩보부대는 ‘정체불명의 부대가 단 하나 있다’고 보고서에 적었다.
두 번째인 나가사키의 원폭 희생자를 포함해 총 사망자는 20만 명 이상. 미국이 재래 무기로 일본 본토를 침공했다면 규슈 상륙작전에서만 4만∼50만 명의 미군이 희생될 것으로 점쳐졌다. 이들의 목숨을 구한 대가로 두 발의 원폭은 면죄부를 받은 것일까. 영국 BBC 출신의 다큐멘터리 제작자인 저자는 평범한 히로시마 사람들의 아픔을 조명하는 데도 게으르지 않았다. 집으로 찾아가 하얗게 타 버린 아내와 어린 딸의 백골을 주워 드는 군인, 눈알이 공처럼 튀어나온 원폭 피해자들 앞에서 카메라를 들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사진기자….
원제 ‘Shockwave: Countdown to Hiroshima’(2005년).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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