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평가되는 해방전후사
해방전후사 평가에 있어 주요 테마는 분단의 책임 소재, 농지 개혁에 대한 평가, 6·25전쟁의 기원과 책임 문제, 이승만에 대한 평가 등이었다.
이런 주제들을 보는 시각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70년대까지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우파적인 시각(전통주의)이 득세했다. 특히 이승만 박정희 정권 아래서는 해방전후사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그나마 관변 논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1980년대 학생·노동운동이 확산되면서 우파의 시각을 뒤집는 견해들이 대거 등장했다. 특히 6·25전쟁의 책임이 소련과 북한에 있기 보다는 미국과 남한에 더 많이 있다는 미국 시카고대 브루스 커밍스의 이론이 소개되면서 좌파적 시각(수정주의)이 세력을 얻어갔다. 그 결과 해방전후사 및 현대사는 반(反)민중 반민족 반민주로 점철된 오욕의 역사라는 시각이 확산됐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부터 기존의 우파적, 좌파적 견해 모두 편향적이라는 비판이 제기 되기 시작했다. 그같은 자성이 실증 사료를 바탕으로 객관적이고 새로운 시각으로 해방전후사를 바라보려는 움직임으로 발전하면서 '해방전후사에 대한 재인식'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전상인(全相仁·사회학) 한림대교수는 "이승만 박정희 시대의 우편향, 1980년대의 좌편향을 경험한 한국 사회가 이제 객관적 사료를 바탕으로 균형있고 종합적 객관적인 시각으로 해방전후사를 인식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다시 평가되는 쟁점들
▽분단 책임 문제=좌파는 남측(이승만)과 미국에 분단 책임이 있다고 주장해왔다. 광복 직후, 좌익과 중도파의 통일정부 수립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미국이 1948년 단독정부를 수립해 분단이 고착화됐다는 것이다.
반면 우파는 광복 직후 소련의 스탈린이 북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지시하고 곧이어 북한5도를 관할하는 '북조선 제(諸) 행정국'을 만드는 등 북측(김일성)과 소련이 먼저 단독정부를 수립함으로써 분단을 초래했다고 반박한다. 우파의 주장은 소련의 비밀문서 등으로 입증됐다.1948년의 남북협상도 처음부터 끝까지 소련공산당의 결정과 지령에 충실한 김일성 세력의 주도 아래 추진됐음도 소련의 자료로 입증됐다.
최근 들어서는 당시의 국제정치 역학관계속에서 양측의 책임을 냉정하게 따져야 한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김일영(金一榮·정치학) 성균관대 교수는 "이승만과 김일성은 단독 정부를 먼저 수립한 뒤 남진통일 북진통일을 추진했던 2단계 통일론자였다는 점에서 등가(等價)인 셈"이라면서 "당시의 엄혹했던 국제적 냉전질서와 국내의 좌우 대립 속에서 중간파의 통일정부 추진은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였다"고 평가했다. 즉 단독정부는 불가피한 차선책이었다는 말이다. 이는 민족 민주 통일이라는 도덕적 명분의 잣대로만 평가할 수 없으며 미국과 소련이 대립했던 당시의 냉전 현실을 중요한 잣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남측의 농지 개혁에 대한 평가=이승만 정권은 1949년 농민들에게 농지를 배분하는 농지개혁을 시행했다. 이에 대해 좌파는 농지를 나눠줬지만 6·25전쟁 과정에서 과도한 세금을 걷어들여 농민을 또다시 피폐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반면 우파는 농민들에게 삶의 토대를 제공한 개혁이라고 평가해왔다.
이에대해 최근에는 농지개혁을 '건국(建國)과 부국(富國)의 과정'으로 봐야 한다는 시각이 최근 제기됐다. 농지개혁이 농민들에게 땅을 제공해 한국인이라는 국가적 소속감(또는 정체성)을 심어주었다는 평가다.
김일영 교수는 "농지 배분을 통해 지주계급을 몰락시켰기 때문에 1960년대 지주 계급의 저항 없이 경제 개발을 추진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6·25 전쟁의 책임 문제=1980년대 성행했던 북침설이나 남침 유도설 또는 내란설은 그 기반이 크게 약화됐다. 1990년대 중반부터 소련과 중국의 남침 관련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수정주의 시각의 근거들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최근엔 6·25 전쟁에 대한 보다 다양한 각도에서의 접근들이 이뤄지고 있다. 그 하나가 6·25 전쟁이 남한의 국가 건설 과정에서 끼친 영향을 분석하려는 시도다. 전쟁을 통해 남한 국민의 통합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같은 시각은 냉전시대가 종식되던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에 그같은 정체성(통합 의식)을 긍정적인 정체성으로 끌어올리지 못한 것이 문제라는 지적으로 이어진다.
전쟁을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볼 것이 아니라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김귀옥(金貴玉·사회학) 한성대 교수는 "분단과 전쟁은 정치적 거시적 시각만으로 파악할 수 없다"며 "보통 사람들의 전쟁 경험을 통해 미시사적 생활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데올로기를 넘어-불임(不姙)이 아니라 맹아(萌芽)의 시기
해방전후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우리 현대사를 좌우 이데올로기의 시각을 뛰어 넘어 객관적 사료를 토대로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과거 독재정권하의 우파적 시각이나 1980년대 이후 좌파의 시각 모두 정치 이데올로기의 굴레에 갇혀 인간을 외면해 버렸다는 자성이 깔려 있는 것이다.
해방전후사에 대한 재평가는 이 시기를 암흑기로만 볼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로도 이어진다. 김영호(金暎浩·국제정치학) 성신여대 교수는 "80년대의 좌파식 견해는 자칫 한국의 해방전후사를 과도하게 부정적으로 인식시킬 우려가 있다"면서 "민주화를 거쳐 자유주의의 완성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시점에서 현대사의 긍정적 요소를 찾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 이뤄지는 해방전후사 재인식 작업에 대한 반론도 있다. 박태균(朴泰均·한국사) 서울대 교수는 "감정적인 접근이 아니라 실증적인 자료에 기초한 그같은 연구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평가하면서도 "하지만 실제론 그리 새로운 것이 없는데다 너무 결과를 놓고 과거를 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현재의 결과만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시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말이다.
박 교수는 또 "인권이나 평화와 같은 인류 보편적 가치가 아니라 경제 성장의 결과만으로 역사를 바라본다면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을 막아낼 논리가 사라질 것"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김일영 교수는 "역사 평가에 있어 현실적인 결과를 무시할 수는 없으며 과거의 잘못을 감추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기준으로 해방전후사의 명암을 제대로 판단하려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덧붙였다.
"해방전후사는 분명 암울한 시기였다. 그러나 오로지 불임의 시기는 아니었다. 해방전후사엔 1960년대로 이어지는 맹아(萌芽)의 측면도 있었다."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
▼‘제3의 인식’ 어떤 연구성과 있나▼
해방전후사에 대한 새로운 연구 성과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말. 당시 저작물로는 유영익(柳永益·역사학) 연세대 석좌교수 등이 펴낸 ‘수정주의와 한국 현대사’ ‘이승만 연구’(이상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 전상인 한림대 교수의 ‘고개 숙인 수정주의’(전통과 현대)를 들 수 있다. 전 교수는 좌우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제3의 방법론을 모색하면서 역사를 경험했던 사람, 특히 서울 사람이 아니라 지방 사람의 시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004년 말엔 차상철(역사학) 충남대 교수의 ‘한미동맹 50년’,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의 ‘건국과 부국’(이상 생각의 나무) 등이 나왔다. 김 교수는 단독정부 수립과 6·25전쟁 등을 국가 형성과 경제 성장 과정으로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이달 말 출간 예정인 ‘해방전후사의 재인식’(푸른 역사)도 눈길을 끈다. 1980년대 386세대를 사로잡았던 ‘해방전후사의 인식’ 시리즈(한길사)가 좌편향이라는 판단에 따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취지로 기획된 책. 박지향(朴枝香·서양사) 이영훈(李榮薰·경제학) 서울대 교수, 김철(金哲·국문학) 연세대 교수, 이정식(李庭植·정치학)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 김남영(경제학) 동국대 교수, 카터 에커트(정치학) 미 하버드대 교수, 차상철, 김일영 교수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 30여 명이 필자로 참가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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