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전환의 사회 변동을 알리는 이러한 변화는 ‘시민사회론’을 사회과학의 핵심적 화두로 부활시켰다. 이즈음 오래 잊혀졌던 한 권의 저술이 새롭게 주목받았다. 물론 학술적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1962년에 출간됐던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이 1980년대 이후 세계적인 사회 변동과 함께 재발견되는 데는 약 30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공론장(公論場)’은 여론이 형성되는 사회적 영역으로 사적 영역에 속하지만 공권력의 영역으로서의 ‘국가’와 사적 영역으로서의 ‘사회’를 매개하는 범주로 설정된다. 따라서 공론장은 시민사회의 본질이자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후기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이론은 초역사적 선험적 비판주의의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초기 저술인 ‘공론장의 구조변동’은 이처럼 시민사회와 민주주의의 현실적 내용에 주목함으로써 ‘공론장’을 시대 유형적 범주로 분석하기 때문에 다분히 경험적이고 역사적이다.
이 책은 중세의 봉건적 권력을 구성하는 귀족들의 궁정문화에 주목해서 이를 인격적, 과시적인 공공성으로 보고 이와 차별적인 부르주아 공론장의 등장을 포착한다. 모두 7개의 장으로 구성된 내용의 전반부는 공론장을 구성하는 제도적 요소와 정치적 기능, 이념 및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분석함으로써 공론장의 구조와 기능에 대해 보여 주고 있다. 후반부에는 이러한 부르주아 공론장의 붕괴 혹은 왜곡의 과정을 사회적 구조 변동과 정치적 기능 변화라는 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책은 부르주아 공론장의 발생과 구성에 대한 논의를 기초로 공론장의 쇠퇴에 대한 비판이론적 분석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왜 부르주아 공론장의 쇠퇴인가? 18세기 국가 권력으로부터 자율적인 사회 영역의 형성 과정에서 부르주아 공론장은 살롱과 클럽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토론문화와 인쇄물의 보급에 따라 ‘문예적 공론장’이 확산되고 이는 ‘정치적 공론장’으로 발전했다. 하버마스의 공론장은 권력에 구속되지 않고 비판적 이성과 합리적 토론으로 형성되는 해방적 공간이다. 그러나 이 같은 공론장의 순수성은 무엇보다도 ‘사회의 국가화’에 따른 국가 권력에 의해 훼손된다.
다른 한편 공중은 문화를 토론하는 주체가 아니라 문화를 소비하는 대중으로 전락함으로써 대중 매체에 다시 침탈된다. 후기의 저작에서 이른바 ‘생활세계의 식민화론’으로 세련되게 다듬어지는 이 대목은 루카치의 ‘물화론’이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의 잔영을 보게 한다.
우리 시대에 소통의 중요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반면에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문화권력은 더욱더 정교하게 공론장을 위협하고 있다. 오늘 토의민주주의가 절실하고 합의의 정치가 긴요한 한국의 현실에서도 이 책은 우리 정치문화의 ‘주관주의적 함정’을 성찰하는 데 모자람이 없다.
조대엽 고려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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