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남기남 감독의 빨리찍기 비결

  • 입력 2005년 8월 18일 03시 08분


《한국영화계에서 ‘빨리 찍기의 전설’로 불리는 남기남(63) 감독이 ‘갈갈이 패밀리와 드라큐라’(2003년)에 이은 신작 ‘바리바리 짱’(19일 개봉, 12세 이상)을 내놨다. ‘영구와 땡칠이’(1989년)로 전국 180만 관객(비공식 집계)을 모으며 한국 아동영화의 명맥을 이어온 남 감독. 사흘 만에 한 편의 영화를 찍어내는 속도로 지금까지 100여 편을 연출한 괴력의 소유자다.》

이런 남 감독이 ‘이례적’으로 2개월이나 공들여 찍은 ‘바리바리 짱’은 초등학교 같은 반이 된 대통령의 아들과 조직폭력배 아들의 이야기. 조폭의 아들이 또 다른 조폭 조직에 납치되자 대통령의 아들과 급우들은 합심해 그를 구출한다. 사실 이 영화는 엉성한 구석이 많다. 하지만 이 영화를 들여다보면 남 감독이 어찌하여 ‘속도전’의 대가가 될 수 있었는지를 암시하는 대목이 곳곳에 깔려 있다.

○ 레디메이드(ready-made) 설정

등장인물들에겐 순진하리만큼 판에 박힌 이름과 복장(드레스 코드)이 주어진다. 이는 주도면밀한 캐릭터 구축 없이도 대번에 등장인물의 성격과 선악을 구분해 주는 편리한 장치가 된다. 대통령 아들의 이름은 ‘바다’, 조폭 아들은 ‘하늘’, 조폭 두목은 ‘흑곰’, 또 다른 조폭 두목은 ‘백곰’. 또 복장의 경우 대통령 아들을 지키는 ‘경호원팀’은 검은 양복, 조폭 아들을 보호하는 ‘조폭팀’은 회색 양복, 조폭 아들을 납치하는 또 다른 ‘저질 조폭팀’은 예외 없이 유치한 꽃무늬 셔츠 차림이다. ‘백곰’의 옷은 흰색, ‘흑곰’의 옷은 검은색임은 물론이다. 게다가 경호원들이 귀에 끼고 수시로 폼을 잡는 이어폰은 첫눈에도 알 수 있는 ‘휴대전화용 이어폰’①. 소품의 리얼리티를 두고 고민할 시간을 단축하면서 주변 물건을 그냥 영화 소품으로 가져다 쓰는 ‘재활용의 미학’이 빛난다.

○ 레디메이드 대사

대사들은 가공할 만큼 상투적이어서 감독은 물론 관객조차 등장인물의 내면을 궁금해 하지 않은 채 술술 영화를 넘길 수 있게 된다. 가난한 여학생의 생일파티에서는 ‘당연히’ 심금을 울리는 ‘애어른’들의 대사가 오간다.

“생일 축하합니다. 와!”(학생 일동) “얘들아. 무엇으로 고맙단 인사를 해야 할지. 흑흑.”(여학생 어머니) “엄마 또 울어? 괜찮아. 우리 친구들은 날 사랑해 준단 말이에요.”(여학생) “그럼요. 살다 보면 언젠가는 행복해질 거예요.”(대통령 아들) “그럼요. 돈은 있다가도 없는 것. 자, 웃으면서 삽시다!”(조폭 아들)

대통령 아들은 ‘당연히’ 똑똑해야 하므로 그는 주로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 활자본’을 두고 급우들과 논한다.

○ 레디메이드 제스처

각종 코미디물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웃기는 동작을 복제하듯 보여 준다. 관객은 뻔하게 여기면서도 조건반사적으로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동료를 뒤쫓아 가다가 문이 닫히자 얼굴을 문에 꽝 부딪쳐 넘어지고 △엉덩이를 때리면 방귀를 ‘뿌웅’ 끼고 △남의 담장 안을 들여다보다가 방범용 쇠꼬챙이가 콧구멍 속으로 쑥 들어가는 것②이 대표적. 이런 행위들을 주고받다가 배우들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보가 터지는 ‘사고’를 치기도 하지만(①의 왼쪽 여자) 촬영은 계속된다. “NG란 없다”는 남 감독의 신조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 레디메이드 유머

영화에는 TV 인기 코미디 프로그램인 ‘개그콘서트’의 멤버가 대거 출연해 자신들의 유행어를 난사한다. 이들 유행어는 별달리 웃길 만한 상황이 없을 때면 어김없이 등장해 숭숭 뚫린 드라마의 구멍을 메우는 역할을 한다. ‘출산드라’ 김현숙은 “이 세상에 날씬한 것들은 가라” “꼭 그렇지만은 않아”를, ‘제2의 옥동자’로 불리는 오지헌은 “안녕, 나 민이라고 해”를 시도 때도 없이 써먹는다. 해당 유행어를 사용할 적절한 타이밍인지 아닌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승재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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