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코드…2000년의 비밀]<2>금속조각품 속의 靈氣무늬

  • 입력 2005년 8월 22일 03시 03분


평양 진파리 7호분 고구려 무덤에서 발견된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 '해뚫음무늬 금동장식품'. 동아일보 자료사진
평양 진파리 7호분 고구려 무덤에서 발견된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 '해뚫음무늬 금동장식품'. 동아일보 자료사진

《2002년 겨울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고구려!’ 특별 기획전이 열렸다. 나는 고구려 고분구조와 벽화의 구성 등을 익히느라 그곳을 자주 찾았다. 고구려 벽화 고분은 고구려가 멸망할 때 이미 훼손되었으며 그 안에 부장했던 유물들은 모두 약탈당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의 작품은 벽화와 절터에서 발견된 불상 이외는 거의 남아있지 않은 아쉬움이 있다. 그런데 천운이라 할까, 진파리 7호분 무덤에서 약탈해 가다가 떨어뜨린 듯한 손바닥만한 ‘해뚫음무늬 금동장식품’(길이 22.8cm, 높이 15cm)이 덜렁 한 점 남아있다. 나는 그 작품을 조사하고 싶어서 주최 측에 간곡히 부탁해 우여곡절 끝에 자정이 넘은 깊은 밤, 그 작품을 조사할 수 있었다. 손에 들고 이를 살피는 나의 가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로 가득 찼다. 그것은 우주에 충만한 신령스러운 기를 빼어나게 형상화한 것이다. 그 조그만 장식판 안의 세계 속에 빠져 들어 보자.》

○ 금동장식품에 숨겨진 봉황과 용

일반인들은 테두리에 연주(聯珠·작은 구슬의 연속) 무늬들이 있는 둥근 원 안에서 태양을 상징하는 삼족오(三足烏·발이 셋인 까마귀) 무늬만을 발견한다. 그러나 무늬 폭이 1∼3mm에 불과한 이 섬세한 장식판에는 봉황 한 마리와 용 두 마리도 숨어 있다.


장식품 중앙 원속의 세발 까마귀와 그 위의 봉황, 양 옆의 용의 형태를 색깔별로 구분한 그래픽.

따라서 ‘삼족오 용봉 무늬 금동투조 장식판’이란 이름이 더 정확한 이 장식품의 무늬 구성을 세분하면 오른쪽 위 채색그림과 같다. 봉황과 용의 형태를 이용하며 절묘한 구성을 이루어 유려하면서도 역동적인 영기(靈氣) 무늬를 표현했음이 뚜렷이 드러난다.

가운데 삼족오의 무늬를 살펴보면, 우선 전체의 흐름을 u자를 변형시킨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입에서는 영기 무늬가 뻗쳐 나오고 가슴·등·꼬리 등에서 모양의 영기 무늬가 나오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힘차게 회전하는 형상이다.

그 위쪽에는 봉황이 날고 있다. 봉황의 머리엔 반(半)팔메트(중동에서 유래한 좌우대칭 구조의 상징적 식물) 무늬가 뻗어 있으며 봉황 전체 모습은 역시 커다란 u자 모양이다. 봉황의 입에서는 영기 무늬가 한 가닥 위로 뻗치고 아래로 한 가닥 길게 뻗쳐 왼쪽 용의 긴 꼬리와 연결돼 마치 봉황의 입에서 용이 뻗어 나오는 듯하다. 역시 가슴과 등과 꼬리에서 영기 무늬가 나온다. 봉황이 차지하는 공간은 좁다. 그것은 봉황의 모습을 길게 변형시킬 수 없는 형태의 한계 때문이다.

○ 숨은 용 두 마리의 영기표현

이에 비하여 삼족오 좌우의 넓은 공간은 두 마리의 용이 차지한다. 그것은 용의 형태적 특징 때문이다. 용은 긴 꼬리와 네 다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꼬리와 네 다리를 얼마든지 늘이거나 다양하게 구성할 수 있다.

좌우의 용의 형태가 같으므로 전체 모습이 잘 남아 있는 오른쪽 용을 자세히 살펴보자. 숨은 그림 찾기처럼 흥미롭다. 역시 용 전체의 형상은 모양을 띠고 있다.

입은 크게 벌렸는데 위 아래로 영기 무늬 같은 곡선적인 이빨이 두 개씩 있다. 뿔은 하나인데 거기에서 긴 영기 무늬가 길게 뻗치며 한 번 휘돌아 오른쪽 앞 다리의 발톱과 연결돼 있다. 각각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간 네 다리를 자세히 보면 발가락을 두 개로 간단히 표현했다. 양쪽으로 뻗친 두 발가락에 영기 무늬 모양의 발톱이 할퀼 듯 날카롭다.

꼬리와 네 다리의 구성은 절묘하기 짝이 없으며 길고 짧은 영기 무늬를 곳곳에 두어 아름답고 힘차다. 우리는 여기서 용이란 동물이 영기의 응축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긴 몸과 다리는 굵어서 쉽게 용의 모습을 알 수 있으며, 그 몸과 다리에서 뻗쳐 나오는 영기무늬는 가늘다. 봉황과 용의 사이에 공간이 생기는데, 그 곳에는 하나의 추상적 영기무늬가 채워져 있다. 왼쪽, 그러니까 앞 쪽의 용이 있는 부분은 일부 파손됐으나 오른쪽 용과 거의 같은 포즈다.

오른쪽 용과 달리 이 용의 입에서는 긴 혀가 나오고 있는데 그 끝이 파손되어서 어떤 형상인지 알 수 없다. 내 생각에는 혀가 아니고 영기무늬가 뻗쳐 나왔으리라 생각하나 현재로선 단정하기 어렵다.

○ 초록색 비단벌레 날개와 황금빛의 조화

평양시 대성구역 청암리 토성에서 발견된 고구려시대 금동보관. 신령스러운 기운을 팔메트 덩굴 무늬로 표현했다. 머리 띠 부분에 ∽자 형태의 팔메트 덩굴 무늬가 조각돼 있고 불꽃 형태의 관 부분 역시 좌우 대칭의 팔메트 덩굴 무늬다. 관 끝 부분에 파장 같은 운동감을 줬다.

손에 들고 앞면을 살피다가 뒷면을 보았다. 나는 그 순간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앞에서만 보았을 때는 평평한 금속판을 오린 것으로 알았는데, 뒷면을 보니 오목하지 않은가. 그 가는 폭의 무늬 전체를 앞에서 보면 볼록하게 돋을새김(浮彫)을 한 것이다. 이 작품이 더욱 역동적 느낌을 주는 것은 이 모든 무늬가 둥글게 돌출돼 있기 때문이었다.

전체적으로 유려한 곡선들을 절묘하게 구성하여 생동감이 넘쳐흐르며 회전의 느낌을 준다. 첫 발견 당시 가장자리와 삼족오가 있는 둥근 판 밑에 둥근 비단이 붙어있었는데 초록색 비단벌레 날개가 깔려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 만들었을 때 중앙과 가장 자리의 찬란한 금색 무늬 사이사이로 역시 붉은 색이 부분적으로 감도는 빛나는 영롱한 초록빛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환상적인 모습이었을까. 가장자리에 못 구멍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 있는 걸 보면 어딘가에 부착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파손이 심한 것이 또 하나 확인됐는데 한 쌍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 학자는 그 비슷한 모양의 것이 중국에도 있어서 베개의 마구리(양쪽 머리면)로 추측하고 있다. 나도 그 의견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이것을 베개로 삼으면 등에서 머리에 이르는 곡선과 일치하여 사람이 편안히 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밤에 쓰는, 죽은 뒤 누워서 쓰는 왕관과 같은 성격의 것이다.

중앙에 태양을 상징하는 새를 두었으니, 이 장식판은 우주에 충만한 영기를 삼족오·봉황·용의 모습을 빌려 표현하였음에 틀림없다. 이만 한 작품이면 피장자는 왕이나 왕족이었을 가능성이 많은데, 이것만 보아도 무덤이 우주의 축소판이며 동시에 피장자가 영기로 가득 찬 세계에 영원히 잠자는 것임을 증명하지 않는가.

○ 고구려 금동보관의 영기무늬

그 귀한 고구려 유품 가운데 평양시 대성구역 청암리 토성에서 발견된 금동보관(金銅寶冠)이 있다. 폭 33cm 높이 35cm 굴곡진 아래 테두리 맨 밑에는 구슬 무늬를 넣었고, 테두리의 주된 투조 무늬는 ∽자의 팔메트 덩굴 무늬다. 그리고 그 무늬 사이사이에 연꽃 봉오리를 입체적으로 만들어 고정시켰다. 그 테두리 양 옆은 장식띠를 매듭지은 채 길게 내려뜨렸다. 관 중앙 무늬는 파손돼 상실된 듯하다. 상실된 양쪽에 영기 무늬를 길게 높이고 가장 간략한 팔메트 덩굴 무늬를 두었다. 주변판을 가위로 가늘게 오리고 한 가닥 한 가닥을 돌려 말아서, 그 영기 무늬 끝에서 색다른 효과를 내어 파장 같은 운동감을 나타냈다. 그 좌우로 다시 대칭으로 위로 길게 힘차게 뻗치는 영기 무늬가 있으며, 다시 양 끝에 추상무늬로 구성된 영기 무늬로 마감되어 있다.

이 금동관 역시 전체적으로 율동감과 역동성을 강렬하게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의 금동 왕관은 발견된 적이 없다. 이 금동보관은 성터에서 발견되었으므로 성 안의 사원에 모셨던 보살상에 장착되었던 보관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관음보살의 보관일 가능성이 큰데, 이 역시 보살의 위대한 정신력을 이처럼 영기 무늬로 나타냈던 것이다.

우리는 이 희귀한 두 작품에서 고구려의 문화가 얼마나 빼어났는가 짐작해 볼 수 있다. 국내성과 평양 지방의 수만(萬)의 무덤이 모두 도굴당했으므로 이 두 점을 통해 고구려의 훌륭한 작품들을 상상해 볼 수밖에 없다.

강우방 이화여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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