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 女優를 말하다]김성녀가 본 ‘셜리 발렌타인’의 손숙

  • 입력 2005년 8월 24일 03시 05분


사진제공 P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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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 빠진 몸매와 멋진 옷차림의 선남선녀들로 붐비는 서울 강남의 청담동. 마치 외국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그곳. 대형 고릴라가 외벽을 타고 올라가는 특이한 모습의 빌딩 지하 소극장에서는 매일 밤 연극 공연의 막이 오른다.

연극을 하기에 약간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그곳에서 40일간의 공연을 마친 나는, 그 고릴라가 오르는 건물의 지하를 다시 찾았다. 이번엔 무대 위 배우로서가 아니라 객석의 관객으로. 그리고 나는 현실을 떠나 꿈을 향한 여행을 시작했다.

○ “대한민국 대표하는 지적인 배우”

셰익스피어 전문배우이자 세계적인 연출가인 글렌 월퍼드가 내한해 깔끔하게 연출한 ‘셜리 발렌타인’은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가장 좋아하는 여성상으로 알려져 더욱 유명해진 작품이다. 집안의 벽하고만 대화를 나누는 권태로운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중년 여인 셜리는 이혼한 친구의 제의로 떠난 그리스 여행을 통해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새로운 삶을 꿈꾸게 된다.

서울 청담동 우림씨어터에서 '셜리 발렌타인'을 관람하고 있는 김성녀 씨. 사진제공 PMC

한국의 셜리, 손숙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지적인 배우다. 그의 연기는 늘 정갈하고 우아하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명연기는 하나같이 아무것도 아닌 듯한 장면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행하는 무심한 동작이 감동을 자아낸 그런 절제된 연기였다. 그는 남편을 잃은 여인의 슬픔을 머리 한번 쓰다듬는 표현으로 완성해 냈고(‘라인강의 감시’), 걸음걸이 몇 발짝에 여든 살 노인의 삶을 담아내기도 했다(‘삭풍의 계절’).

이번 작품에서도 그는 조금도 과장 없는 연기로 꿈을 잃은 인생에 대해 말한다. 자칫 흥분해 감정을 누르지 않고 쏟아낼 수도 있지만, 그는 모노드라마에서 여배우들이 흔히 저지르기 쉬운 우를 범하지 않고 스스로 그 역할을 즐기면서 편안한 연기를 펼쳤다. 이는 오래된 배우로서의 구력이자 그의 노하우다. 그는 꿈을 찾아 떠나는 주부 셜리를 담담하게 그려낸다. 그녀는 또, 비키니를 입고 나오는 정열로 멋진 연애를 꿈꾸는 셜리의 불같은 열정을 대변한다. 그러고는 여러분의 꿈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

○ 나이를 알 수 없는 에너지가 넘친다

셜리를 보면서 나는 셜리 아닌 손숙의 ‘꿈’을 생각해본다. 어쩌면, 자신에게 주어졌던 좋은 기회도 연극 때문에 놓아야 했던 그의 삶에서 연극은 그가 평생 꿈꿔왔고, 앞으로도 꿈꿀 대상이다. 로맨스는 모든 사람들이 품고 있는 비밀스러운 꿈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현실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루고픈 꿈을 위해 산다.

공연 후 손숙 선배와 와인 한잔을 즐겼다. 이제는 힘들어 쉬고 싶다고 했지만 지쳐 있는 얼굴 뒤엔 연극이라는 꿈속에 인생을 건 나른한 행복이 넘쳐 보이고, 나이를 알 수 없는 에너지가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와인의 향 속에 내 꿈도 어른거린다. 연극인들에겐 어쩐지 어색하기만 한 이 청담동 거리가 연극을 즐기는 사람들로 넘치는 문화의 거리로 탈바꿈하고, 고릴라가 올라가는 건물 지하 소극장에도 관객이 넘쳐 몇 년 후에도 여전히 예쁘고 우아한 손숙 선배의 연극을 볼 수 있는 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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