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단체 산증인 김영성 관훈클럽 사무국장 이달말 퇴임

  • 입력 2005년 8월 24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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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뒷바라지만 했을 뿐, 모든 일은 기자들이 알아서 했죠. 전 인터뷰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니까요.”

이달 말 중견 언론인의 모임인 관훈클럽 및 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 사무국장에서 물러나는 김영성(金永盛·66·사진) 씨는 “언론계 아웃사이더였다”며 한사코 인터뷰를 고사하다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그는 1964년 기자협회에 몸담은 뒤 21년간 근무하다가 1985년 관훈클럽으로 옮겨 또 21년간 일해 온 언론계의 산증인이다. 그와 같이 일했던 언론인들은 한결같이 “김 국장의 빈틈없는 일처리가 없었으면 기자협회나 관훈클럽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건국대 법학과에 재학 중이던 1964년, 동아일보에 다니던 친형(김진배·金珍培·전 국회의원)의 권유로 기자협회에 발을 들여 놓았다. 박정희(朴正熙) 독재정권의 언론 탄압이 정점에 이르렀던 시절, 그도 기자협회 핵심 간부로서 정권과 사사건건 부딪혔다. 기자협회는 1974년 동아일보의 이른바 ‘백지 광고’ 사태 때 국제언론인회(IPI)에 이와 관련된 보고서를 제출하기 위해 준비하다가 중앙정보부에 발각됐다. 그도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사표를 강요받았지만 당시 김병익(金炳翼·현 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기자협회장이 “이 사람은 관계없다”고 적극 변호해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1985년 관훈클럽 사무국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1987년 노태우(盧泰愚)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김종필(金鍾泌) 후보의 대선 토론회를 성사시켰다. 그는 “워낙 민감한 사안이다 보니 질문 순서, 패널의 성향 등을 두루 고려하는 등 긴장된 상태에서 토론회를 열었다”며 “패널들이 당당하고 예리하게 질문했다는 평을 듣고 기뻤다”고 말했다.

그는 2000년 한국 언론의 역사와 흐름, 취재 시스템, 언론윤리 등을 종합해 단행본 ‘한국 언론의 좌표’를 발간한 것을 가장 보람 있는 일로 꼽았다.

그는 “과거엔 언론사끼리 견해차가 있더라도 서로 이해하는 분위기였는데 최근엔 갈등이 커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언론계가 스스로 위상을 높여 가야 한다”고 말했다.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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