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가 ‘리어왕’을 쓸 무렵 생을 시작한 한 그루 나무가 있었다. 뉴턴이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목격했을 즈음 이 나무는 막 싹을 틔우고 있었다.
거대한 산불이 북미 대륙을 휩쓸고 간 직후, 소나뭇과에 속하는 ‘더글러스퍼(Douglas-fir)’ 나무에 매달려 있던 구과(毬果)가 천천히 비늘껍질을 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속에 있던 날개 달린 씨앗을 ‘재의 숲’으로 날려 보냈다. 산불의 열기가 수십 년 동안 닫혀 있던 단단한 열매껍질을 열어젖힌 것이다.
씨앗은 갓 자란 들꽃의 잎사귀 아래로 피신했다. 그리고 공기와 햇빛과 물을 빨아들이며 생명의 풀무질을 시작한다.
‘비는 천국에서 오고, 불은 지옥에서 온다’(단테)고 했던가. 그러나 더글러스퍼는 그 ‘인페르노(Inferno)’ 속에서 생명을 잉태시켰다. 불도 비처럼, 곤충의 윙윙거림처럼, 날다람쥐나 붉은나무들쥐의 찍찍 소리처럼 온전한 숲의 일부였던 거다.
이 나무는 이제 400년의 수령을 헤아린다. 키는 50m가 넘고 둘레가 5m에 이르는 거대한 나무로 자랐다.
자신의 오두막이 있는 해변의 오솔길에서 이 나무를 바라보던 저자는 불현듯 작가 존 파울스의 말을 떠올렸다. “나무는 시간을 뒤튼다!”
장구한 시간 스스로를 영속시키며 진화의 경이로움을 증명하는 나무. 나무는 시간의 형상(形象)이다. 나무의 욕망과 맹목 그리고 그 놀라운 힘! 나무는 자신의 나이테 속에 시간을 옭아매며 이 적막한 행성에 생명의 뿌리를 내려 왔다.
이 책은 한 그루 나무에 대한 전기(傳記)다. 한 그루 더글러스퍼 나무의 일생을 담쟁이 덩굴처럼 촘촘하게 엮는다.
저명한 환경운동가이자 생물학자인 저자는 나무 한 그루의 생애를 줄기 삼아 온갖 생물의 역사와 자연현상으로 가지를 친다. 다른 시대와 세계 모든 곳을 우리와 연결시키며 지구라는 행성에 사는 모든 나무, 모든 생명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무는 저마다 공동사회의 일원이다. 숲 속의 나무들은 흙 속에서 뿌리끼리 서로 섞여서 하나가 된다. 서로 소통하고, 서로서로 나누며 돕는다. 그 어떤 나무 하나도 고립된 섬이 아니다. ‘더불어 숲’이다. “나무에게 은둔자의 모습은 낯선 것이다.”
나무는 지상의 모든 것을 품는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준다. ‘모든 살은 풀이다’라는 성경의 비유처럼 우리의 생은 전적으로 나무에, 그 식물의 세계에 빚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무는 생명이라는 드라마에서 엑스트라처럼 서 있다. 배경처럼 그 자리에 그렇게 있다. 우리는 좀처럼 그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나무는 죽어 가면서도 숱한 생명의 보금자리와 피신처가 되어 준다. 고사목이 된 거목은 쓰러져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볼록한 흙무덤을 만든다. 그리하여 완전히 흙으로 돌아간 고목(枯木)의 일생을 지켜보노라면 어찌 숙연해지지 않으랴.
먼 훗날, 이곳을 지나는 나그네는 숲 속에 죽어 나뒹구는 통나무가 한때 거대한 더글러스퍼였음을 알까. 그 통나무에 흐르던 생명의 핏줄이 우리와 이어져 있음을 알까.
“우리와 한 그루 나무가, 그 나무와 인연을 맺고 있는 작은 미생물 하나, 새 한 마리, 늑대 한 마리가, 아니 이 대지와 우리가 온통 하나였음을!”
원제 ‘TREE-A Life Story’(2004년).
이기우 문화전문 기자 keywoo@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