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오창을 차지하셨으니 대왕께서는 하늘이 하늘로 여기는 큼지막한 쌀뒤주를 끼고 싸우시게 된 셈입니다. 여기에 다시 성고와 형양을 빼앗아 동쪽을 제압하는 발판으로 삼으시면, 관중은 절로 지켜질뿐더러 주린 항왕의 대군을 멀리 내쫓는 데도 더할 나위 없는 지리(地利)를 차지하시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신이 가만히 살피니, 이 일만으로 자족해 하실 때는 아닌 듯합니다. 아무래도 동쪽의 일을 이대로 보고 있어서만은 아니 되겠습니다.”
‘하늘이 하늘로 여긴다’함은 곧 백성들이 가장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다. ‘임금 노릇 하려는 자는 백성들을 하늘로 여기고(왕자이민위천·王者以民爲天) 백성들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라는 말에서 나온 비유이다. 한왕은 전에 역이기에게서 한번 들은 적이 있어 그 말은 쉽게 알아들었지만, 동쪽의 일이 무얼 가리키는지는 얼른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쪽은 한신과 장이를 보냈고, 또 조참과 관영까지 보태주지 않았소? 그런데 갑자기 왜 그쪽 일을 꺼내는 것이오?”
한왕이 그렇게 묻자 역이기가 진작부터 생각해 온 일인 듯 열기 있는 목소리로 쏟아놓았다.
“한신과 장이가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고, 조참과 관영이 할 수 있는 일이 또 따로 있습니다. 지금 연(燕)나라와 조(趙)나라는 평정되었으나, 제(齊)나라는 아직도 대왕의 뜻을 받들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항왕을 맞받아친 그 기세로 우리 한나라를 경계하고 있어, 조나라나 연나라를 거둘 때와 같이 했다가는 오히려 우리가 큰 낭패를 보게 될 것입니다.
전광(田廣)은 왕이 되어 넓은 제나라를 차지하고, 그를 왕으로 세운 전횡(田橫)은 의기와 용맹으로 전광을 도와 제나라를 굳건히 떠받들고 있습니다. 전간(田間)은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역하(歷下)에 머물러 있으며, 그 밖에 많은 전씨(田氏) 일족이 적지 않은 군사들을 이끌고 곳곳에 흩어져 제나라를 지키고 있습니다. 실로 만만히 볼 수 없는 종성(宗姓)입니다.
또 제나라 땅은 남쪽으로는 태산의 험난함에 의지할 수 있으며, 동쪽으로는 달아나 숨을 수 있는 바다를 등지고 있습니다. 서쪽은 맑은 제수(濟水)가 가로막고 있고, 북쪽으로는 흐린 하수(河水)가 막아주고 있습니다. 굳게 지키기와 달아나 숨기에 아울러 좋은 땅입니다.
거기다가 제나라는 땅이 남쪽으로 초나라와 붙어있는 데다, 거기 사는 사람들은 변덕이 많고 속임수를 잘 씁니다(인다변사·人多變詐). 어제까지는 초나라와 죽기 살기로 싸웠지만, 언제 마음이 변해 초나라와 한편이 되어 대왕께 맞설지 모릅니다. 지금 보내 놓은 장졸들만으로는 평정하기 어려울뿐더러, 대왕께서 몸소 수십만의 대군을 이끌고 가신다 해도 몇 달 또는 한 해 안에 쳐부술 수는 없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되겠소?”
“바라건대 신을 사신으로 삼아 제나라로 보내 주십시오. 그리하면 신이 세치 혀로 제왕(齊王)을 깨우치고 달래 대왕의 뜻을 받들도록 해보겠습니다.”
역이기가 그렇게 자신 있게 대답했으나 한왕은 영 미덥지 않았다.
“과연 제왕이 선생의 말을 들어주겠소?”
그러면서 역이기를 마주 보았다. 역이기가 제풀에 달아올라 큰소리를 쳤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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