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코드…2000년의 비밀]<4>황남대총 금동제 말안장의 용무늬

  • 입력 2005년 9월 5일 03시 02분


경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5세기 신라시대 금동제 말안장의 앞가리개(전륜). 원래 황금색을 띠었지만 녹이 슬어 초록색으로 바뀐 표면에 추상적 용무늬가 투조돼 있고 그 안으로 녹색과 황금색을 띠는 비단벌레의 날개가 비친다. 사진 제공 강우방 교수
경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5세기 신라시대 금동제 말안장의 앞가리개(전륜). 원래 황금색을 띠었지만 녹이 슬어 초록색으로 바뀐 표면에 추상적 용무늬가 투조돼 있고 그 안으로 녹색과 황금색을 띠는 비단벌레의 날개가 비친다. 사진 제공 강우방 교수
《얼마 전 경주에서 가장 크고 높은 황남대총(皇南大塚)에서 출토된 5세기의 금동제 말안장을 조사하러 국립경주박물관을 찾았다. 여러 번 봐왔던 것이지만 이번은 목표가 뚜렷했다. 금동제 말안장의 투조(透彫)된 용무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성됐는지, 그 원류는 어디에 있는지, 또 투조 조각 밑에 수천 마리 분량의 영롱한 비단벌레(옥충·玉蟲) 날개를 까는 그 기법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 60마리의 용이 투조된 황남대총 말안장

황남대총 말안장의 투조 조각은 그동안 막연히 용무늬로만 추정돼 왔으나 이번 조사로 그 용무늬의 구성을 구체적으로 밝혀냈다. 같은 폭으로 용무늬를 추상적으로 표현해 형태를 잡기 어렵지만 용 얼굴에 하나의 눈이 있어서 몇 마리가 있는지 가까스로 헤아려 볼 수 있었다. 전륜과 후륜 부위 용무늬를 헤아려 보니 무려 각각 30마리의 용들이 표현되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용무늬가 점차 추상적인 영기(靈氣)무늬로 환원돼 감을 알아볼 수 있었다

투조된 그 용무늬 밑에 무려 2000여 개의 비단벌레의 날개가 촘촘히 겹쳐져 있었다. 반짝이는 녹색과 적색이 어울리는 영롱한 무지개 색을 배경으로 황금빛 찬란하게 번쩍이는 용무늬를 상상해 보라. 이 세계에 수많은 말안장이 있을 테지만 이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숨 막히게 하는 말안장을 본 일이 있는가. 그것은 경이(驚異) 그 자체였다.

황남대총 금동제 말안장 앞가리개(전륜)에 투조된 30마리의 용무늬를 구별한 개념도. 파랗게 칠한 부분이 용의 눈이고 노란색과 주황색으로 구별한 각각의 개별 용무늬 아래 부분에 동그랗게 말려들어간 부분들이 용의 발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 왜 이 무늬가 용모양의 영기무늬일까. 무늬를 자세히 보면 전면적으로 날카로운 매 발톱 같은 것들이 돌출되고 있는데 그것들이 바로 영기의 싹인 것이다! 고고학자의 견해에 의하면 황남대총은 5세기 전반기의 고분이라 하니 이 말안장의 용무늬는 초기의 것으로 영기무늬가 점차 뚜렷한 용의 모습을 갖추기 전의 추상적 형태임을 알 수 있다.

○ 말안장에 용무늬를 새겨 넣은 이유

고대의 말안장 투조 무늬는 거북이 등껍데기 형태의 귀갑(龜甲)무늬 안에 여러 무늬를 새겨 넣기도 하고, 용무늬를 새겨 넣는 것도 있다. 제법 사실적인 용무늬도 있지만, 가장 많은 것이 같은 폭으로 극히 추상적 무늬로 동판(銅版)을 투조한 독특한 용무늬의 영기무늬이다. 이러한 추상적인 용무늬 영기무늬를 투조한 말안장은 신라와 가야에 많다.

그렇다면 말안장에 왜 용무늬 영기무늬를 새겼을까. 동양에서 용이나 봉황무늬는 왕을 상징한다. 왕이 외출하거나 출정(出征)할 때 그 말안장은 바로 왕이 앉는 자리, 즉 어좌(御座)가 된다. 어좌이기 때문에 말안장 앞뒤에 용무늬를 새기며 그 바탕에 비단을 깔거나 비단벌레 날개를 깔아서 위엄과 화려함을 뽐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밖의 여러 마구(馬具)에도 단편적인 영기무늬를 투조하게 된다. 그러니 말 자체가 어좌가 된다. 이제 지배자와 말은 한몸이 된다. 말이 없이는 전쟁을 할 수도, 또 다른 나라를 정복할 수도 없다. 말의 가장 큰 매력은 속력에 있으니 역사적으로 모든 위대한 정복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을 탄 모습이다.

아마도 그 당시 말 자체를 용으로 생각하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말을 탄 절대자의 모습이니 여러 마구에 각종 용무늬 영기무늬를 새겨 넣음으로써 말을 용으로 삼으려 했으리라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신라의 천마총(天馬塚)에서 출토된 장니(障泥·말이 질주할 때 진흙이 튀지 않도록 씌우는 배가리개)에 그려진 기린(그동안 천마로 알려진 것이 최근 X선 촬영 결과 뿔이 나타나 기린임이 확인됐다)의 입에서도 영기가 발산되고 있다. 흔히 기린의 혀라고도 하나 그것은 영기무늬이다. 그럴 만큼 옛 사람들은 지배자의 말을 용이나 기린으로 인식하려 했던 것 같다.

○ 용무늬 말안장의 기원

그렇다면 이러한 말안장의 용무늬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최근 중국 지린(吉林) 성 지안(集安) 시 완바오팅(萬寶汀) 78호에서는 고구려의 말안장이 처음으로 출토됐다. 이 말안장에 용무늬가 투조돼 있다. 우리나라 고고학계에서는 이보다는 선비족이 만든 랴오닝(遼寧) 성 자오양(朝陽)동 십이대(十二臺) 묘지(墓地) 88M1출토의 4세기 말안장을 그 원류로 주목한다. 이 말안장은 거북이 등껍데기 형태의 귀갑무늬가 투조돼 있고 그 조그만 6각형 공간에 용이나 봉이나 괴수 등이 선각(線刻)돼 있어 내가 보기에는 신라의 것과는 연관성이 적었다.

대신 나의 시선을 강하게 끈 것은 같은 지역인 라마(喇&)동 II M101 출토의 안장이었다. 거기에는 비교적 사실적인 용의 무늬가 중앙에 용 한 마리를 두고 좌우대칭으로 다섯씩 모두 11마리가 투조돼 있다. 그 무늬를 극단의 추상적 무늬로 만들면 바로 완바오팅 78호에서 출토된 고구려의 말안장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추상적 용무늬 영기무늬였다. 역동적인 용무늬 영기무늬, 그것이 요서(遼西)의 선비족 문화와 교류하며 고구려에서 확립돼 신라와 가야로 맥이 이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완바오팅 78호 고구려의 말안장은 6세기 초 유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고분유물이 거의 없어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보다 훨씬 더 이른 시기에 용무늬 말안장이 확립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중국과 고구려 사이에 선비족이 세웠던 전연(前燕) 후연(後燕) 북연(北燕) 등 삼연(三燕) 지역은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지역이었다.

특히 광개토대왕(374∼413)이 국토를 크게 확장할 때 후연을 압도하고 고구려의 후예가 북연의 왕이 되자 고구려 연합세력이 동북아를 주도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4세기 말∼5세기 초 북연과 교류하면서 고구려 나름의 말안장의 조형성이 확립돼 신라와 가야 그리고 일본으로 퍼졌음을 알 수 있다.

○ 비단벌레 날개 장식의 기원

이러한 말안장은 중국에는 없다. 요서지방에서 발원하고 고구려에서 확립돼 신라, 가야, 일본에 널리 전파된 매우 독특한 금속 마구 공예품이다. 백제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은 중국과 밀접한 관계로 기울어졌던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신라에서 말안장에 비단벌레 날개를 까는 기법도 고구려 진파리 고분 출토 ‘삼족오 용봉 무늬 금동투조 장식판’에서 본 바와 같이 고구려에서 비롯돼 전파됐을 가능성이 크다. 비단벌레는 대략 3cm 길이의 딱정벌레의 일종이다. 한국에서는 현재 경남, 전남 및 제주도의 일부지역에서만 채집되는 희귀종이다. 일본에서는 간사이(關西), 규슈(九州) 등 널리 분포한다. 두 날개는 초록색과 금색 등으로 영롱하게 빛나는데 영구적으로 색깔이 변하지 않아 삼국시대와 일본 아스카(飛鳥), 나라(奈良)시대 마구의 투조 무늬 밑에 깔아 장식용으로 쓰였다.

일본 학자들은 한국이 일본에서 비단벌레를 받아 마구에 사용했다고 주장해 왔으나, 황남대총의 말안장에서 무려 2000여 마리의 비단벌레가 발견됨에 따라 한국이 일본에 영향을 줬음이 확실해졌다.

강우방 이화여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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