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58>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9월 9일 03시 08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하지만 제나라가 이미 항복하였다는데 무엇 때문에 다시 병마(兵馬)를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오?”

괴철의 말을 듣고 있던 한신이 무거운 목소리로 그렇게 되물었다. 괴철이 무언가를 일깨워주듯 차분히 말했다.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장군께서는 반드시 제나라로 군사를 내셔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역이기는 한낱 변사(辯士)로서 수레 앞채에 기대 세 치 혀만으로 일흔 개가 넘는 제나라의 성을 항복시켰습니다. 그런데 장군께서는 몇 만의 군사를 거느리고서도 한 해가 넘도록 겨우 조나라의 쉰여 개 성을 항복받았을 뿐입니다. 대장군으로서 동쪽을 맡아 한왕을 떠난 지 여러 해 되었는데, 그 공은 한낱 선비보다 못하니 이 어찌된 일입니까? 거기다가 제왕이 우리 한나라에 항복한 것은 반드시 역이기의 변설에 넘어가서만은 아닙니다. 한단에서 제나라를 노려보고 있는 장군의 대군이 두려워 역하(歷下)에 20만이나 되는 대군을 보낸 그들 아닙니까? 그리 해놓고도 장군과의 피투성이 싸움이 두려워 항복한 것이니, 역이기는 오히려 세 치 혀를 놀려 장군의 승리를 훔친 것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우리가 제나라를 치면 임치에 있는 역 선생은 어찌 되는 것이오?”

“천리 적지에 홀로 들어갔으니 빠져 나올 방도도 마련해 두었겠지요. 정히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장군께 군사를 멈추라는 요청이라도 보내 올 것입니다. 그때 군사를 멈추면 원래 장군께 돌아가야 할 공적을 반이나마 되찾는 게 되지 않겠습니까?”

한신도 듣고 나니 괴철의 말이 옳게 여겨졌다. 곧 조참과 관영을 불러들인 뒤 괴철에게 들은 말을 전하고 어찌할까를 물어보았다. 조참과 관영도 같은 무장이라 그런지, 역이기가 자신들의 공을 가로챘다는 괴철의 부추김에 바로 넘어갔다.

“제나라 사람들은 반복이 많고 속임수를 좋아한다고 들었소. 입으로 한 말은 언제 뒤집을지 모르니 그 말만 믿고 여기서 군사를 되돌릴 수는 없소.”

조참이 그렇게 말했고, 관영은 한술 더 떴다.

“차라리 잘됐소. 물 건너 평원성뿐만 아니라, 역하에 있다는 20만 제군(齊軍)도 저희 임금이 우리에게 항복하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방비가 허술해졌을 것이오. 오늘 밤 조용히 하수(河水)를 건너 평원성을 떨어뜨린 뒤, 밤낮 없이 군사를 휘몰아 역하로 달려갑시다. 우리 군사가 쳐들어왔다는 소문보다 먼저 역하에 이르러 거기 있다는 제나라 군사 20만만 불시에 흩어버릴 수 있다면, 임치는 우리 손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소. 제왕(齊王) 전광과 재상 전횡(田橫)만 사로잡으면 동쪽의 근심은 사라지는 것이오.”

그러면서 앞장 서 하수를 건너자고 우겨댔다. 이에 한신도 마음 놓고 괴철의 말을 따랐다. 그날로 전군에게 명을 내려 하수를 건널 채비를 갖추게 했다.

때는 한(漢) 4년이 시작되는 겨울 10월 중순이었다. 한나절도 안돼 떠날 채비가 갖춰지자 한신은 그날 밤으로 군사를 움직였다. 으스름 달빛 아래 하무를 물린 장졸들을 하수 가에 모은 한신은 얼음이 굳게 얼어붙는 새벽을 기다려 조용히 하수를 건넜다. 자신이 조나라에서 새로 기른 군사와 조참 관영의 군사를 합쳐 3만 남짓이었으나, 밖으로는 10만을 일컫는 대군이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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