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아웃’이란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영화에는 남자가 집에서 살림만 하는 것을 부끄럽거나 감추고 싶은 비밀이란 전제가 깔려 있다. 이 같은 전제를 배반하고 방송사 퀴즈쇼에 나가 만천하에 자신의 정체를 공개하는 주인공 오진만. 이런 남편이 부끄러워 집을 나가는 아내 때문에 진만은 잠시 시련을 겪지만 마지막에 부부는 가정의 행복을 되찾는다는 내용이다.
모처럼 코미디로 돌아온 한석규는 엘리트 회사원에서 ‘솥뚜껑 운전 6년차’로 변신한 오진만 역을 맡아 자연스럽고 편안한 주부(主夫)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인조 속눈썹에 마스카라까지 칠하고 스타킹에 하이힐을 신은 그의 깜짝 변신은 웃음을 이끌어내는 데 한몫한다. 방송국 MC로 일하는 아내 역에는 신은경이 나온다.
이자 몇 푼 더 받으려는 욕심에 계를 부었다가 계주가 도망가는 바람에 아내 모르게 당장 3000만 원을 마련해야 할 처지에 놓인 진만. 주부 퀴즈쇼의 상금을 노린 그는 여장을 하고 퀴즈쇼 예심에 나가지만 남자라는 사실이 들통나고 만다. 하지만 방송사에서는 오히려 화제가 될 거라는 생각에 그를 출연시킨다. 시사 상식은 물론 살림에 밝은 진만은 3주 연속 우승에 도전하면서 단번에 유명 인사가 된다.
‘남성 전업 주부’라는 소재 자체가 새롭고 흥미로운 만큼 영화는 이 점을 마음껏 활용한다. 전통적인 남편과 아내의 역할과 대사를 바꾸어 주된 웃음 코드로 활용하는 것. 할인점 시식 코너를 그대로 못 지나치고, 깜짝 세일로 나온 오징어를 차지하기 위해 온몸을 던지며, 몸매 관리를 위해 동네 아줌마들과 경보를 하는 진만의 일상은 잔잔한 웃음을 전해준다. 여기에 남성인 그를 왕따시키지 않고 한 팀에 끼워주는 이웃 주부들과 완고한 아버지가 “할 거면 제대로 해라”고 아들을 은근히 격려하는 모습도 신선하다.
하지만 명문대를 나왔다는 진만이 왜 재취업을 포기하고 전업 주부가 되는지, 그 과정에선 어떤 갈등이나 고민을 겪었는지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어 관객들은 진만의 선택에 쉽게 공감이 가질 않는다. 살림과 육아 등 똑같은 노동을 반복하는 전업 주부들은 주부우울증까지 걸릴 지경인데, 밥 하고 아이 키우는 진만의 하루는 왜 즐겁고 신나는 놀이처럼 보이는지도 이상하다.
진만을 통해 가정을 지키는 주부들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듯한 이 영화에서 시간이 남아돌아 고스톱을 치거나, 간밤에 본 드라마를 가지고 수다나 떠는 등 주부들에 대한 그릇된 통념을 그대로 복기하는 점도 찜찜하다. 무엇보다 진만이 행복해지는 결론이 전업 주부에서 벗어나 유명인사로서 바깥일까지 병행하는 ‘슈퍼 우먼’, 아니 ‘슈퍼 맨’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소수의 남성 전업 주부와 다수의 여성 전업 주부의 심기를 공히 어지럽히는 일이 아닐까.
‘아라한 장풍대작전’의 공동 각본을 맡은 유선동 감독의 연출 데뷔작. 29일 개봉, 12세 이상.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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