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소 한 마리를 키우며 목장 운영의 꿈을 키워가던 시골 노총각 석중(황정민). 그는 읍내 다방에 새로 온 여 종업원 은하(전도연)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진다. 석중은 매일 아침 자신이 직접 짠 우유 한 병과 장미꽃 한 송이로 은하의 마음을 잡아보려 하지만, 알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가진 은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끊임없는 프러포즈 끝에 석중은 은하와 결혼하고 둘은 꿈같은 신혼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은하에게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 선고가 내려진다.
‘너는 내 운명’은 이 세상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촌스러운 단어들로 가득 차 있다. 에이즈에 걸린 여자의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은하’이며, 게다가 그녀가 일하는 칙칙한 티켓다방의 이름은 ‘순정’이며, 노총각이 그녀에게 털어놓는 가슴 절절한 사랑 고백은 고작 “난 거짓말 안 해요” “예뻐요. 세상에서 제일 예뻐요” “내가 지켜줄게요” “행복하게 해 줄게요” “사랑해요” “결혼해 주세요” 따위의 것들이니 말이다.
이 영화는 이런 순진하고 순결한 단어들을, 세상이 생각하는 가장 더럽고 지저분한 인식(티켓다방, 에이즈)들과 일대일로 짝을 맺게 하는 얄궂은 방식을 통해(심지어 감독은 “에이즈에 걸린 다방 여종업원은 무조건 예뻐야 한다”면서 전도연의 화장과 의상에 특별한 신경을 썼다고 한다), ‘단순한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사랑에 관한 신화를 가슴 절절하게 설파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행하여지는 사랑’만큼 누구나 간절히 염원하는 사랑이 또 있을까. 이 영화가 주는 눈물의 본질은 이것이다.
다큐멘터리 PD 출신의 박진표 감독은 70대 노인들의 섹스를 다큐 형식으로 담아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장편 데뷔작 ‘죽어도 좋아’에 이어 이번에도 실화를 소재로 삼아 ‘죽어도 좋은’ 사랑이 자신의 화두임을 내비쳤다. 박 감독의 관심은 어떤 장애를 극복한 끝에 더욱 빛나는 ‘상대적 사랑’에 있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지치지 않고 미친 듯 사랑하는 ‘절대 사랑’에 있는 게 분명한 것 같다. 박 감독은 정작 은하가 에이즈 선고를 받고 난 뒤부터의 이야기에서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관성적으로 집고 넘어가며 ‘외곽’을 때리는 대신, 석중과 은하의 사랑 속을 더 비집고 들어가는 직설화법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달콤한 인생’ 이후 욱일승천하는 황정민은 이 영화로 연기파 남자배우 삼인방(최민식 송강호 설경구)의 뒤를 잇는 최고 배우의 자리를 굳혔다. 그가 크고 작은 표정에서 ‘나는 (연기에) 최선을 다한다는’ 자기암시를 살짝만 더 감출 수 있다면 완벽해질 것이다.
엉덩이를 솜사탕처럼 흔들면서 말끝마다 “오, 진정?”하고 천박한 듯 진지한 듯 말을 던지는 전도연. 그는 ‘인어공주’의 대중적 실패를 딛고, 자신이 ‘진정’ 사랑을 이야기하는 한 대중도 자신을 사랑해 줄 것이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은 채 또다시 사랑 이야기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아름답다. 그녀는 ‘여배우’가 아니라 ‘배우’다. 23일 개봉. 18세 이상.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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