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상 아이들에게 책을 읽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도 책을 읽고, 잠들기 전에 아이들에게도 책을 읽어 주는 것이었다. 피아노 악보를 암보하고 레고 조립을 더 좋아하는, 틀림없이 우뇌아인 것 같은 열두 살짜리 큰 아들은 지금부터 엄마 눈치를 봐 가며 오락을 더 많이 한다. 자연스럽게 잠자리 책읽기는, 벌써부터 ‘자연’이니 ‘속상해’ 같은 단어를 이해하는 네 살 난 딸아이의 차지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어, 이상하다. 어렸을 때 아들에게 책을 읽어 줄 때는 못 느꼈던 이상한 일이 지난 4년간의 책 읽기 과정에서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었다. 8년 전 큰아이에게 읽어 주었던 동화책을 버리지 않고 다시 딸아이에게 읽어 주었던 나는 3세 이상 5세 미만의 아이들에게 읽어 주는 이 동화책에 여자 주인공이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제30회 한국출판문학상을 수상했고, 한국아동문학인협회가 추천했던 이 책 30권에는 정말 단 한 명의 여자아이도 나타나지 않는다.
개, 염소, 원숭이, 꽃게, 곰 같은 동물들과 할머니를 찾아가는, 아빠를 백화점에서 잃어버린, 벽장 속의 괴물을 무서워하는 남자 아이들이 나오고, 심지어 바람과 해님도,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 조각도 주인공인데 왜 여자 아이는 주인공이 못 될까? 그 다음 단계에 읽어 주는 5세 이후의 동화책들은 인어공주니 신데렐라니 엄지공주니 효녀 심청이니 무슨 공주와 왕비들의 행렬로 어지럽다. 물론 여자 아이들을 위해 고쳐 쓴 여성주의 동화가 있기는 하지만 이 역시 5세 미만의 동화책은 아니다.
글을 모르는 5세 미만의 아이들은 주로 그림을 위주로 동화책을 본다. 그림 속에서 바지를 입고 머리가 짧은 남자 아이들만 나온다면, 딸이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길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가끔은 동화책을 덮고 딸에게 내가 틈틈이 시간 날 때마다 지어 놓은 새로운 동화를 들려준다. 그 속에는 자신의 머리 모양이 바뀐 줄도 모르는 이웃 왕자를 등지고 세상을 돌아다니는 바지 입은 공주 이야기도 있고, 알고 보니 착한 괴물인 용과 친구가 된 여자 아이 이야기도 있다.
나는 오랫동안 어머니에게서 세상은 위험하고 잔인한 곳이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내 딸에게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세상을 돌아다닐 용기를 주고 싶다. 왜냐하면 두려움 속에서 사는 인생은 반쪽 인생이므로. 새로운 동화가, 말도 못하고 글도 모르는 우리 어린 딸들을 위한 동화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심영섭 영화평론가·심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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