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승리보다 아름다운 패배…‘위대한 패배자’

  • 입력 2005년 10월 1일 03시 06분


◇위대한 패배자/볼프 슈나이더 지음·박종대 옮김/400쪽·1만5000원·을유문화사

《지구는 ‘좌절의 별’이다. 종(種)으로서의 인간은 진화의 무수한 굴곡을 넘어온 고독한 승자지만,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모두가 실패자에 가깝다. 경쟁이 우리의 사고와 욕망을 지배하면서 20세기는 낙오자를 양산했다. 패배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같은 이름을 사용한 아들의 명성에 묻혔던 요한 슈트라우스. 그는 어떻게든지 음악가가 되는 것만은 막으려 했던 아들에 대한 질투심에 치를 떨었고, 평생의 숙적이던 동생(토마스 만)에게 짓눌렸던 하인리히 만은 절망의 세월을 보냈다.

탁월한 재능 때문에 괴테의 미움을 샀던 렌츠. 그는 괴테에게 내침을 당해 모스크바의 빈민굴에서 서서히 미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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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자들은 자기들만의 신학적 논리를 개발했다. “패배와 곤궁과 고통은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게 아니라 특별한 사랑의 표시다.”(성서 욥기)

실패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허용한 진정한 자유일까?

실러는 이렇게 읊는다. “시 속에 영원히 살아 있으려면 삶에서는 쓰러져야 할지니!”

‘예수의 눈을 가진 아름다운 남자’였으나 비정한 처단자였던 체 게바라. 그가 살해되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큰 인기를 누릴 수 있었을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반란을 일으킨 수병들을 무참하게 도륙했던 트로츠키. 그가 스탈린에 의해 그렇게 마지막까지 쫓기며 죽임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대중의 연민을 살 수 있었을까?

그리고 또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지 않았더라도 그의 영웅 신화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죽을 때까지 한 마리 외로운 독수리처럼 대서양의 바위섬에 홀로 앉아 물끄러미 태양을 바라보는 황제의 모습은 전설이 되었다.

이 책은 승리를 원했고, 조금만 행운이 따라주었다면 승리를 거둘 수도 있었으나 결국은 무릎을 꿇었던 패배자들의 이야기다. ‘하나의 삶 이상을 살았기에 한 번 이상 죽어야 했던’ 위대한 패배자들의 역사다. 그 슬픈 기록이다.

독일의 저명한 언론인 출신인 저자는 좌초한 영웅들의 삶을 돌아보며 성공의 원초적 근원으로서 실패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김질한다.

오스카 와일드는 스스로 파멸을 불렀다. 인생의 정점에서 그렇게 깊이, 그렇게 가혹하게, 그리고 그렇게 경박하게 추락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내 영혼의 진주들을 포도주 잔에 녹여 마셨다”고 호언했던 와일드. 그는 인생의 꿀맛에 지쳤던 것일까. 동성애 혐의로 법정에 섰을 때 외국으로 도주할 기회가 있었으나 거절했다. “경험 삼아 화형장의 장작더미에 한 번 올라가 보고 싶네!” 그는 번개를 끌어내기 위해 허공으로 손을 뻗었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이 책에는 여러 유형의 패배자가 등장한다.

아군과 적군에게서 동시에 존경을 받았던 로멜(‘영광스러운 패배자’), 선거에 이기고도 대통령이 되지 못한 앨 고어(‘승리를 사기당한 패배자’), 친구에게 노벨상을 빼앗긴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명성을 도둑질당한 패배자’)….

그리고 하늘에선 일등성이었으나 지상에선 벌레처럼 뒤척였던 고흐(‘살아서 인정받지 못한 패배자’). 그가 피카소처럼 오래 살았다면 굼뜨기 한량없는 시대정신은 그의 작품을 이해했을까.

백과사전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항상 궁금했다는 저자. 승자는 패자보다 거칠고, 비정하고, 역겨운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승리자로 가득 찬 세상보다 끔찍한 것은 없다. 그나마 삶을 참을 만하게 만드는 것은 패배자들이다.”

우리는 위대한 패배자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을 깨닫는다.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좌절을 겪었지만, 그 운명을 비극으로 승화시킬 줄 알았다. 깨끗하게 승복할 줄 아는 패배는 아름답다. 좋은 패배자는 즐겁게 웃지만, 승리자는 음흉하게 웃는다.

로마의 공화주의자 카토는 카이사르와의 싸움에서 패한 뒤 승리보다 빛나는 명언을 남겼다. “승리는 신들의 것이고, 패배는 카토의 것이다!”

원제 ‘GROSSE VERLIERER’(2004년).

이기우 문화전문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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