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고와 포로생활은 그에게 정신적 개안(開眼)을 준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자신이 매달려 온 것들의 의미를 잃게 되면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라는 회의에 빠진다. 내면의 고통으로 신음하던 그는 어느 날 아시시 교외의 다 허물어져 가는 성(聖)다미아노 성당을 지나다 이끌리듯 안으로 들어간다. 예수 성상 앞에 무릎 꿇고 오랜 기도를 올렸다. 그때 어디선가 이런 말이 들려왔다.
“프란체스코야, 가서 너의 집을 고쳐라. 이렇게 쓰러져 가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느냐?”
충격을 받은 그는 마침내 자신의 남은 생에 몰두할 일을 찾았다고 결심한다. 가족과 재산을 버리고 이곳저곳 성당을 돌아다니며 수리하는 막노동을 시작한다. 허름한 갈색 농부 옷을 입고 가죽띠 대신 ‘청빈, 순결, 순종’을 상징하는 세 겹의 밧줄을 허리에 두르고 성당들을 수리하며 가난한 자, 병든 자와 하나가 된다. 이 소식은 그가 지나는 곳마다 퍼져 나갔다. 하나 둘 제자들이 생겼고 이는 자연스럽게 수도회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모태가 된 수도사들의 공동체 ‘작은 형제회(Ordo Fratum Minoram)’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 형제회는 청빈을 주장하는 ‘탁발 수도회’였다.
작은 형제회가 만들어진 시기는 유럽에 본격적으로 도시가 들어서기 시작한 때였다. 시민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경제적 여유가 생긴 때였으니 수도사들을 도울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된 셈이었다.
로마에서 차로 북쪽으로 1시간 반가량 떨어진 아시시에는 성프란체스코의 유해가 모셔진 ‘성프란체스코 성당’이 있다. 이 성당은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로마의 베드로 성당과 함께 종교의 경계를 뛰어넘은 성지로 지금도 순례자들의 발길을 끌고 있는 곳이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