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78>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10월 5일 03시 05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진나라의 도위(都尉)로서 장한을 따라 함곡관을 나왔던 이 동예(董예), 일찍이 신안(新安)에서 20만 항졸(降卒)과 함께 땅에 묻혔어도 억울할 것 없었다. 구차하게 살아남은 부끄러움이 있으나, 또한 그리해서 왕후(王侯)의 영화까지 누려 보았으니 생판 밑진 장사는 아니었다. 무엇을 뉘우치고 무엇을 한탄하리!”

동예가 제 칼로 제 목을 찌르기 전에 한 말은 그랬다.

한왕 유방이 사수(5水)가에 이른 것은 조구와 사마흔, 동예 세 사람이 차례로 목숨을 끊고, 나머지 살아남은 초나라 장졸들은 모두 항복한 뒤였다. 세 사람의 주검을 돌아본 한왕이 처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염치를 아는 자들이었다. 모두 정중하게 묻어 주어라.”

그때 진평이 다가와 깨우쳐 주었다.

“들으니 적의 기마 몇 기가 우리의 에움을 뚫고 성고성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급하게 뒤쫓아 성안의 적들에게 우리를 맞아 싸울 채비를 갖출 겨를이 없도록 하십시오.”

“성고의 주력은 조구를 따라와 여기서 무너졌으니, 성안에는 그리 큰 병력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오. 서둘 것 없소.”

한왕이 그렇게 느긋하게 대꾸했다. 그때 장량이 다가와 진평을 거들었다.

“그럴수록 서둘러 성고성을 쳐야 합니다. 겁먹은 적이 사람과 재보를 챙겨 형양성으로 달아나기라도 하는 날이면 항왕에게서 우리 볼모를 되찾을 모처럼의 기회를 잃게 됩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오?”

“대왕께서는 태공(太公) 내외분과 왕후께서 항왕의 군막에 볼모로 계신 것을 잊으셨습니까? 그런데 성고성 안에는 항왕이 천하에서 긁어모은 재보와 함께 그 가솔과 총애하는 미인들까지 모두 있다고 합니다. 급히 성고성을 에워싸 그들만 사로잡을 수 있다면 우리도 그들을 볼모로 삼아 태공 내외분과 왕후를 구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눈앞의 싸움에 정신이 뺏겨 항왕에게 볼모로 잡혀 있는 태공 내외와 여후(呂后)를 깜박 잊고 있던 한왕도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장졸들에게 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고 사수를 건너게 한 뒤 회오리바람처럼 전군을 휘몰아 성고로 달려갔다.

한왕이 성고에 이르니 성벽 위에는 지키는 군사가 없고 성문은 사방으로 활짝 열려 있었다. 한왕은 급한 마음에도 적군의 속임수가 있을까 걱정이 돼 군사를 멈추고 탐마를 보내 성안을 살펴보게 했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탐마가 돌아와 알렸다.

“적은 이미 사람과 재보를 챙겨 달아나고 없습니다. 남문으로 나갔다는 것으로 보아 형양성으로 달아난 듯합니다.”

“적이 달아난 지 얼마나 되었다더냐?”

한왕이 그렇게 묻자 살피러 갔다 돌아온 군사가 들은 대로 말했다.

“우리 대군이 이르기 한 식경(食頃) 전쯤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함께 있던 장량이 나서서 말했다.

“적군은 많은 재보와 아녀자를 보호해 가는 길이라 움직임이 더딜 것입니다. 거기다가 형양까지는 50리가 넘는 길이니 서두르면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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