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어느 지점에서인가 그는 그냥 ‘진실이’였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라는 CF 카피와 함께 나이를 먹지 않을 것 같은 그의 이름은 귀여움과 친근함의 상징이었다. 이후 야구선수 조성민(32) 씨와의 결혼과 이혼을 거친 그는 이제 두 아이를 둔 ‘아줌마’가 됐다.
그는 최근 KBS 2TV 드라마 ‘장밋빛 인생’에서 맹순이로 맹활약하고 있다. 그의 우여곡절을 떠올리게 하는 이 드라마는 시청률 35%를 넘어서고 있다. 최근 촬영 현장에서 있었던 그와의 만남과 전화 인터뷰, 드라마를 통해 ‘최진실 인생 코드’를 풀어본다.》
● 무너진 판타지, ‘진실이’
그의 전성기 코드는 ‘수제비’와 ‘남자는…’라는 카피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수제비를 물리도록 먹었다는 그의 또 다른 별명은 ‘최 수제비’다. 그럼에도 TV에서는 그늘 없이 당차고 귀여웠고, 시청자들에게 ‘귀여운 여인’의 판타지가 심어졌다.
영화 ‘각설탕’의 프로듀서 이정학 씨는 “최진실은 당시 톡톡 튀는 개성으로도 스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줬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혼 때문에 판타지가 무너졌다. 40대 후반으로 ‘안티 최진실 카페’에서 활동하는 한 누리꾼은 “이혼 문제로 진실성이 없고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 사람이 천연덕스럽게 활동하는 게 싫다”며 “‘장밋빛 인생’을 통해 최진실이 현실에서도 피해자처럼 보이는 게 불만”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최진실 판타지’는 이혼 이후 장애물이 됐다. 최진실은 “팬들을 ‘배심원’으로 앉혀 놓고 2, 3년간 이혼 문제로 시끄럽게 했다”며 “그 과정에서 치부를 생생하게 보여 줬다”고 말했다.
매니지먼트사 ‘사이더스HQ’ 박성혜 본부장도 “귀여움과 상냥함으로 상징됐던 한 스타의 결혼과 이혼 과정이 생중계처럼 전달되면서 이미연 고현정과 달리 고상한 컴백은 불가능했다”고 밝혔다.
● 현실 같은 드라마, 드라마 같은 현실.
‘장밋빛 인생’에서 보여 준 그의 모습은 충격적이다.
주름 통치마에 헐렁한 셔츠를 입은 맹순이(최진실)가 자신을 배신한 남편(손현주)에게 분노의 이단옆차기를 날린다. 통쾌한 순간도 잠시.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그가 “이혼하려면 나 죽을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하자, 사정을 모르는 남편은 “어느 세월에 죽느냐”며 화를 낸다.
흥미로운 것은 맹순이와 최진실의 눈물이 현실과 드라마의 일치감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대사를 하다가 ‘이 말은 이전에 누구에게 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놀랄 때가 많아요. 맹순이로 울다가 때때로 내 자신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최진실)
어려운 가정에서의 성장과 연하의 남편, 이혼 파문 등 드라마의 얼개는 최진실을 주인공으로 미리 정한 듯하다. 연기자들은 작품에서 사생활이 연상되는 것을 피하는데도 최진실은 아예 정면으로 맞섰다. 이 드라마를 선택할 때 전속 계약이 끝나지 않은 다른 방송사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연하 남성은 안 되고, 이혼 얘기 피하고, 불륜은 빼고…. 그러고 나면 내가 할 수 있는 드라마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넘어야 할 벽이라면 ‘맹순의 탈’을 통해 내 인생도 한번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 세 번의 장미
그는 제목에 장미가 들어간 드라마와 인연이 있다. ‘장미와 콩나물’(1999년), ‘장미의 전쟁’(2004년)에 이어 ‘장밋빛 인생’이 세 번째다.
‘장미의 전쟁’은 ‘애인’의 이창순 PD가 연출하고 ‘질투’에서 호흡을 맞춘 최수종이 상대역으로 출연해 기대가 컸던 작품. 최진실의 역할은 무능한 남편을 구박해 이혼했다가 재결합하는 산부인과 의사였지만 시청자의 반응은 차가웠다.
“한 사람(조성민)과 너무나 길고 힘들게 싸우다 정신없이 드라마에 들어갔어요. 아이 하나를 둔 커리어우먼인데 아이는 잊고, 커리어우먼만 기억했던 것 같습니다.”(최진실)
데뷔 시절부터 그를 지켜본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는 ‘장미의 전쟁’이 실패한 것에 대해 “팬들은 솔직한 최진실을 원했지만 그는 옛날 이미지를 벗어나지 않으려 했다”고 말했다.
● 장밋빛 인생
촬영장에서 만난 최진실은 잠이 부족한 듯 중간 중간 코디와 매니저 사이에서 잠을 청했다. 인터뷰가 쉽지 않았다. 그는 “두 아이의 엄마라는 것만 빼고 맹순이에게 모든 것을 줬다”고 말했다.
상대역인 손현주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진실 씨와 첫 작품인데 저렇게 독한 배우였냐”고 되묻기도 했다.
최진실에게는 톱스타였던 10년보다 지난 몇 년이 더 길었다.
“드라마 출연이 없는 1년여 동안 애들하고 여행을 다녔습니다. 나를 잡아줄 것이 필요했어요. 아이들을 보면 용기와 희망을 얻다가 방에 들어와 혼자 있으면 다시 절망에 빠지는 과정이 반복됐습니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마누라 죽이기’에 함께 출연한 영화배우 박중훈은 “‘장밋빛 인생’에서 ‘생활의 때’가 잔뜩 묻어 있는 최진실을 보며 놀랐다”며 “내면이 깊은 척하는 ‘연기’가 아니라 진짜 깊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최진실은 최근 “촬영에 집중하느라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며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더 하고 싶었던 듯한 말은 이랬다.
“그 사람은 가장 잘하는 야구를 할 때 살아 있고, 저도 드라마를 할 때 아름다운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아이라는 공통분모가 남겨져 있습니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공통분모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죠.”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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