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천변풍경]<2>엽편소설 ‘멀미 때문에’/조경란

  • 입력 2005년 10월 10일 03시 00분


우리는 가마쿠라로 가고 있었어요. 자동차로 도쿄에서부터 두 시간쯤 걸리는 관광지였어요. 모처럼 일본에 온 언니는 피곤한 줄도 모르고 새벽부터 김밥을 싸고 신이 났어요. 유지랑 피크닉을 가는 게 그렇게나 즐거웠나 봐요. 첫 조카 사랑은 정말 끔찍하다더니 언니가 딱 그렇지 뭐예요. ‘큰 이모’를 이제 겨우 ‘큰 마마’로 발음하는, 두 돌이 막 지난 우리 유지도 제 신발을 손에 쥐고선 어서 가자고 저를 막 잡아끌었어요. 그런데 차 안에서 말이에요 아버지, 글쎄 유지가 칭얼거리기 시작하더니 아침에 먹은 꼬마 김밥을 게워 내기 시작하는 거예요. 울고 토하는 유지를 데리고 언니는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저는 유지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곤 그냥 웃고 말았어요.

“어머, 이제 보니 얘 지금 멀미하는 거 아니니?”

피식 웃음이 나오는 걸 참고 저는 고개를 끄덕거렸어요.

“누가 네 아들 아니랄까봐 그런 것까지 닮고 그러니.”

언니가 살짝 저를 흘겨보더군요. 다행히 유지는 곧 멀미를 멈추고 잠이 들었어요. 그러게요, 유지는 멀미하는 것까지 저를 쏙 빼닮았네요, 아버지. 그런데 아버지, 제가 아버지를 닮은 데가 많다는 거 그거 아세요?

1970, 80년대 문인과 지식인들에게 문화적인 자양분을 공급했던 청계천 주변의 헌책방 거리 풍경. 동아일보 자료 사진

여기 살아도 아침에 일어나면 인터넷으로 한국 일간지들을 살펴보는 것이 일과가 되었어요. 우리 가족들 아침에 일어나면 맨 먼저 신문부터 찾아 읽는 것, 아버지가 세 딸에게 붙여 준 버릇이잖아요. 이촌향도(離村向都)하여 서울 봉천동 산동네에 둥지를 튼 많은 가난한 가장처럼 아버지도 우리 세 자매에게 혹독하게 공부를 시켰어요. 매일 아침 신문을 읽히는 것뿐만 아니라 그 어린 우리들을 새벽 세 시부터 깨워 공부를 시킨 건 지금 생각해도 너무 하신 일이에요. 아무튼 세 딸을 교사로 만드는 것이 아버지 평생 꿈이었죠. 막내가 정교사로 발령을 받았을 때 아버지가 크게 웃던 모습은 정말 잊을 수가 없어요. 누구도 그때의 아버지처럼 소리도 없이 활짝 웃지는 못할 것 같아요. 언니가 소설가로 등단을 했을 때도 말이에요. 저만은 아버지가 바라던 대로 교사도 작가도 되지 못하고 결혼을 하여 되레 이 땅을 떠나 살게 된, 아버지 가슴에 피멍 들게 한 딸이 되고 말았지만요.

47년 만에 청계천이 부활한다는 소식, 여기서도 듣고 있었어요. 가마쿠라로 가는 자동차 안에서 유지가 멀미를 했을 때 저는 언니와 아주 오래 전, 우리가 그 길을 아버지와 함께 걷고 있던 때를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그때가 프로야구 첫 개막식이 열리던 해였어요. 1982년 그해, 아버지도 기억하고 계시죠? 어느 먼 나라에서는 대지진이 일어나기도 했고, 우리나라에선 건국 후 최대 규모의 금융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고, 비운의 복서였던 김득구 선수가 사망한 해이기도 했지만 그날 동대문운동장에 모인 3만여 명의 관중은 아마 프로야구 출범식을 그해 가장 인상적인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초등학생인 막내와 중학생이었던 언니와 저, 이렇게 세 딸을 훈장처럼 거느리고 아버지도 동대문운동장으로 가고 있던 중이었어요. 그날은 각각 서울과 대전을 연고지로 둔 팀들의 경기가 열리는 날이었거든요. 아버지가 응원할 팀은 물론 서울을 연고지로 둔 팀이었지요.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저는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어요.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먹은 것이 다 넘어오려고 했어요. 무엇보다 자꾸만 식은땀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너, 얼굴이 왜 그래? 옆에서 언니가 물어봤어요. 대답을 할 수가 없었어요. 왜? 어디 아파? 언니가 자꾸만 제 팔을 잡아당기는 통에 아니 괜찮아, 하려던 것이 그만 버스 바닥에 토를 하고 말았어요. 못 볼 걸 봤다는 듯 승객들이 일제히 우르르 피했고 여기저기서 싫은 소리들을 해댔죠.

동대문운동장으로 가는 사람들로 버스는 만원이었거든요. 아버지 얼굴이 시뻘게졌어요. 얼른 제 팔을 움켜잡더니 짐짝처럼 저를 밀어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게 했어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저는 가로수 밑에다 참고 있던 멀미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누군가 제 등짝을 철썩, 철썩 후려치는 것이 느껴졌어요. 이게 뭐냐, 촌스럽게! 등 뒤에서 아버지 목소리가 들렸어요.

네가 여기 식모 살러 온 사람이냐?

아버지가 고함을 쳤어요. 영문도 모른 채 막내는 찔끔찔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언니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어요.

너는 서울 사람이다.

마침표를 찍듯 아버지는 그 문장을 정말 제 등짝에 찍어 누르듯 말했어요. 저는 연방 멀미를 해대면서 아버지, 아무리 아닌 척해도 우리가 서울 사람이 되지는 못할 거예요, 한때 저 다리 밑에 다닥다닥 모여 있던 천막촌들을 한번 생각해 보라고요, 우리가 사는 산동네 판자촌이랑 뭐가 다르냐고요, 하지만 저는 아무 말도 하질 못했어요. 네, 너무 서러웠거든요 아버지. 성장한 후에도 그 기억만큼은 잊혀지지 않았어요.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지 못했고 걸어서 동대문운동장까지 가기로 했어요. 헌책방 거리가 있던 청계5가와 6가를 지나 동대문운동장으로 가는 청계천 길가의 모습은 지금은 다 잊었지만, 한때 그 아래 철철 흘렀을 시냇물을 덮은 콘크리트 위에 굴러다니던 메마른 소음은 지금도 다 기억날 것 같아요. 현기증이 쏟아졌고 저는 자꾸만 뒤처졌어요. 마침내 우리가 도착했을 때, 개막식은 끝나 있었어요. 경기도 이미 중반을 한참 지나 있었고요.

집으로 가자.

아버지는 단호하게 말했어요. 아니에요. 그 목소리에 너무나 기운이 쑥 빠져 있어서 저는 서울 사람들 앞에서 멀미를 한 것,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사과하고 싶어졌어요. 그러나 그 말도 못 했어요. 아버지에게 하지 못한 말이 지금껏 너무나 많아요. 아버지와 우리 세 자매는 다시 그 먼 길을 되돌아 걸어야 했어요. 집으로 가는 길은 정말이지 너무나 멀었어요.

지금까진 알고도 모른 체했지만요, 아버지. 아버지도 사실 차를 탈 때면 멀미 심하게 한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그때 제 등짝을 철썩 후려치실 때, 아버지 얼굴도 왜 그렇게 노란색이었는지 이젠 알아요. 지금까지 아버지, 뭐든 너무 너무 참기만 하면서 살아오셨잖아요. 술에 취하면 종종 그때, 네가 식모 살러 여기 왔느냐고 고함을 치면서 제 등짝을 후려친 일, 그게 그렇게도 마음에 걸린다고 말씀하신다면서요. 언니한테 들었어요. 아버지 많이 늙으셨나봐. 말끝에 언니가 훅, 한숨을 내쉬었어요. 이젠 언니도 가버려서 집 생각이 부쩍 더 나요. 둘째 출산일은 점점 다가오고 있고요. 둘째가 딱 유지만큼만 크면요 아버지, 저 다시 서울로 돌아갈지도 몰라요. 엄마가 차려 준 밥상도 받아보고 싶고 예전처럼 그렇게 아버지랑 다시 그 길을 걷고도 싶어요. 이젠 딸 셋만이 아니라, 손자 손녀, 사위들까지 가족이 부쩍 늘었네요. 우리가 모두 나란히 서서 걷기 어려울 만큼 말이에요. 너무 늦지만 않았다면 아버지 저도 황학교 옆에 있다는 ‘소망의 벽’에다 제 소원을 적은 타일을 하나 새겨 넣고 싶어요. 그땐, 제 소원이 무엇인지 아버지께만 살짝 말씀드릴게요. 어느 날엔가 만약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저는 또 한번 삶이 눈부시게 열리는 그런 순간을 느끼게 될 거예요. 그때도 아버지, 우리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건강하세요.

도쿄에서, 아버지의 둘째 딸 올림.

●소설가 조경란씨는

―1969년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96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 단편 ‘불란서 안경원’으로 당선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문학동네 신인작가상 수상

―‘국자 이야기’ ‘코끼리를 찾아서’ ‘가족의 기원’ ‘나의 자줏빛 소파’ 등 젊은 여성과 가족의 내 면을 들여다보는 작품집과 장편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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