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것은 두려워도 춤추는 것은 두렵지 않다”는 이들은 무대에 들고 날 때 다른 이의 부축을 받기도 했지만, 춤출 때만큼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혼신의 힘을 다한 춤사위를 보여 줬다. 마지막 춤 순서가 끝나자 이 공연 연출가인 진옥섭 씨가 무대로 나와 “객석의 불을 켜 달라”고 주문했다. 이어 그는 장금도(77) 씨를 다시 무대로 불러냈다. 영문을 모른 채 무대로 나온 장 씨는 객석에서 한 초로의 사내가 올라와 꽃다발을 건네자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 남자는 장 씨의 외아들인 이영철(60) 씨였다.
연출가 진 씨는 “어머니가 기생 춤꾼이라는 사실을 용납하지 못해 불화했던 가족과 장 선생님이 꼭 50년 만에 화해하시게 됐다”고 사연을 설명하다가 목이 메어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장 씨는 이날 아들이 자신의 공연을 지켜본 것을 알지 못했다.
12세 때 기생이 된 장 씨는 전북 일대에서 춤으로 이름을 날리다가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위안부로 끌려 나가는 것을 피하려고 어느 집안의 후처로 들어갔다. 아들 이 씨를 낳았지만 먹고살 길이 막막했던 그는 다시 기생으로 나섰다. 그러나 아들이 열 살 되던 해 “엄마가 친구네 집 잔치에서 춤을 췄느냐”고 울며 대들자 그날로 춤을 작파했다. 꼭 50년 전 일이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TV 국악 프로그램도 보지 않았다”는 장 씨는 심지어 한복을 입으면 행여 ‘기생’ 태가 날까봐 양장만 고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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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씨는 전통무용계에서 ‘민살풀이춤(수건을 들지 않고 추는 살풀이춤)’을 가장 고형(古形)에 가깝게 출 수 있는 인물로 꼽힌다. 하지만 아들 때문에 자신의 재주를 숨기고 살아온 탓에 이날 무대에 선 6명 중 유일하게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했다. 전날인 8일 ‘전무후무’ 공연을 본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공연 직후 출연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어떻게 하면 장 선생님도 인간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느냐”며 관심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장 씨가 아들과의 약속을 깨고 50년 동안 무대에 선 것은 서너 차례. 장 씨의 춤을 아까워한 몇몇 무용인사들의 설득에 못 이겨서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세탁소에 한복을 맡겨 놓은 뒤 가족에게는 “나들이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몰래 나서야 했다.
이날 공연장에는 아들 이 씨뿐만 아니라 며느리, 손자, 손자며느리, 증손녀까지 와서 장 씨가 무대에 선 모습을 지켜봤다.
“어머니가 춤추는 것을 처음 봤다”는 아들 이 씨는 “어머니가 나 때문에 인간문화재 지정도 못 받으셨구나 싶어 마음이 아프다”며 “이제라도 마음껏 춤을 추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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