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2005 노벨 문학상 英극작가 해럴드 핀터

  • 입력 2005년 10월 14일 03시 01분


런던 자택 앞에서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해럴드 핀터 씨가 13일 영국 런던의 자택을 나서고 있다. 런던=AP 연합뉴스
런던 자택 앞에서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해럴드 핀터 씨가 13일 영국 런던의 자택을 나서고 있다. 런던=AP 연합뉴스
해럴드 핀터 씨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은 지난 25년간 그의 연극에 심취하여 연구해 온 필자로서는 가슴 벅찬 낭보다. 그는 셰익스피어식 언어 연극이 영국 무대를 지배하던 1950년대 말 혜성처럼 나타나 신선한 충격과 큰 변화를 몰고 왔다. 75세가 된 지금까지도 그의 작품들은 연극적 신선함과 현대인의 고뇌를 폐부까지 관통하는 지적 날카로움으로 더욱 새로운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는 초기에는 사뮈엘 베케트와 함께 부조리극의 대표적 작가로 꼽혔으나 후기에는 정치적 비판의식이 뚜렷한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도발적 소재와 사실적인 글쓰기 그리고 비밀스레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며 일상의 이면을 폭로하는 작가로 평가된다. 신선하고도 꽉 짜인 대사와 기발한 무대 기교 그리고 이를 결합시켜 탄생시킨 기괴하고 악몽적인 분위기는 ‘핀터적(Pinteresque)’이라는 형용사까지 등장시켰다.

그의 첫 작품 ‘방’은 1957년 연극공부를 하던 친구의 부탁으로 사흘 만에 쓴 희곡이다. 베케트나 에우제네 이오네스코의 어설픈 흉내라는 혹평을 받았지만 유명한 평론가 해럴드 홉슨으로부터는 극찬을 받았다. 그는 1958년 ‘생일파티’ ‘벙어리 웨이터’ ‘관리인’을 내놓은 뒤에는 “연극의 새 지평을 열 천재 작가”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창작 2기는 1960, 70년대다. 1960년대 작품으로는 ‘정부’ ‘귀향’ ‘침묵’ 등이, 1970년대 작품으로는 ‘옛날’ ‘황무지’ ‘배신’ 등이 있다. 1960년 이전의 초기 작품이 ‘미지 세계에 대한 공포’ ‘인간의 동물적 본능과 투쟁’에 관한 것이었다면 2기 작품세계는 ‘과거로의 회상과 복귀’로 변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84년 ‘마지막 한잔’을 발표하면서 “이제는 정치적이지 않은 연극은 쓰지 않겠다. 더는 은유적으로만 이야기할 수 없는 참을 수 없는 세상이 되고 있다”고 선언했다. 이후 일관되게 인권문제 핵문제 등을 다뤘다. 이 시절의 작품으로는 ‘새로운 세계질서’ ‘달빛’ ‘재는 재로’ ‘지나간 일들의 기억’ 등이 있다.

핀터 씨가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미국 극작가 아서 밀러와 1980년대 말 펜클럽의 일원으로 터키를 방문하면서부터. 극우파로부터 부당한 억압을 받고 있는 좌익 인사들에 대한 인권문제를 확인한 그는 이후 부당하게 고통 받는 사람들과 고문문제에 대해 강도 높게 언급했다. 또한 그는 자기 동네 근처에 지하 미군 핵 기지가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지면서 핵의 공포와 부당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작품화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1960년대 초부터 ‘생일파티’ 등 그의 초기 작품들이 소개됐다. 필자가 1992년 극단 실험극장에서 연출, 발표한 ‘배신’을 비롯해 ‘빅토리아 역’ ‘귀향’ 등 많은 작품이 무대에 올려졌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그에 대한 연구와 공연이 더욱 활발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박철완 동서대 공연예술학부 교수

■ 그는 누구인가

102번째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영국 극작가 해럴드 핀터 씨는 현존하는 최고 수준의 지성파 극작가로 영미 문학계에 자리를 굳힌 대가다. 그는 중년 부인의 권태를 다룬 연극 ‘티타임의 정사’(원제 The Lover·情婦)의 극작가로 국내에도 이름이 낯설지 않다. 그는 연출가 배우 시인 정치 운동가로서도 지칠 줄 모르고 활동해 왔다.

그는 1930년 10월 10일 런던에서 유대인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75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주말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작품 낭독회, 심포지엄, 그의 희곡을 무대에 올리는 피터 씨 탄생 축제가 열려 연극계 저명인사들이 대거 모였다. 하지만 정작 영국에선 별다른 행사 없이 지나갔다.

그는 왕립 연극아카데미를 중퇴했으며 1951년 ‘연설과 드라마 중앙학교’에서 배우 수련을 받은 뒤 배우로 첫발을 뗐다. 1956년 여배우 V 머천트와 결혼했고 이듬해 처녀 희곡인 단막극 ‘방(The Room)’을 내놓았다. 이어 1958년 잇달아 희곡 작품을 내놓으면서 새로운 별로 명성을 떨쳤다. 이 해에 그의 연극 ‘생일파티’가 텔레비전에 방송되었으며 ‘벙어리 웨이터’ ‘관리인’이 성공리에 무대에 올려졌다.

그의 연극들은 침묵이 큰 역할을 해 ‘침묵의 연극’이라고 불렸다. 언어의 연극에 반기를 든 것으로 그는 현대 영국 연극의 혁명가로 손꼽혔다. 그는 초기 작품들이 “사뮈엘 베케트, 프란츠 카프카, 그리고 미국의 갱 영화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대표작 ‘배신’ 등 29편의 희곡을 썼으며 제레미 아이언스와 메릴 스트립이 나온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비롯한 24편의 시나리오를 썼다. 연극 연출가로서도 제임스 조이스의 ‘추방’ 등 모두 27편을 무대에 올리는 등 종횡무진의 활약상을 보였다.

그는 2002년 식도암 수술을 받고 암을 극복해냈다. 이때 “나는 암 종양이 죽는 것을 보고 싶다”는 내용의 시 ‘암세포’를 발표했다. 그는 “암 투병을 통해 죽음을 더욱 의식하게 됐다. 과거에는 세상의 일부로서 반응했다면 이제는 그 바깥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됐다. 과거엔 정치적으로 열정적이었지만 이젠 달라졌다”고 말했다. 이는 암 발병 이전 그가 시민운동가로서도 열성적으로 활동한 것을 가리킨다.

그는 2000년 미국을 비롯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이 유고를 공습할 때, 2003년 미국과 영국 등이 이라크를 침공할 때 대규모 집회에서 반전 연설을 했다. 2000년 당시 ‘서방 세계의 공적 1호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를 옹호함으로써 웃음거리가 됐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는 “밀로셰비치가 무죄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민간인이 살상된 폭격을 지시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도 마찬가지다”라고 반박했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해럴드 핀터 작품 연보:

▽단편 소설 △심문(1955년)

▽희곡 △방(1957년) △생일 파티(1958년) △벙어리 웨이터(1958년) △핫하우스(1958년) △시사풍자극(1959년) △관리인(1959년) △야간학교(1960년) △컬렉션(1961년) △정부(1962년) △귀향(1964년) △지하아파트(1966년) △풍경(1967년) △침묵(1968년) △옛시절(1970년) △독백(1972년) △사장된 땅(1974년) △배신(1978년) △가족의 목소리들(1980년) △정확하게(1983년) △마지막 한잔(1984년) △산골 사투리(1988년) △새로운 세계질서(1991년) △달빛(1993년) △재는 재로(1996년) △축하파티(2000년) ▽시나리오 △펌킨 이터(1963년) △사건(1966년) △프랑스 중위의 여자(1980년) △수제 이야기(1987년) △꿈꾸는 아이(1997년) △리어의 비극(2000년)

▼대학로 ‘핀터 페스티벌’ 올 3회째▼

2일 서울 대학로에서 막을 내린 ‘핀터 페스티벌’에서 공연된 연극 ‘배신’의 한 장면. 동아일보 자료사진
해럴드 핀터 씨에 대한 국내의 관심도 높은 편이다.

얼마 전 서울 대학로의 한 소극장에서는 ‘핀터 페스티벌’이 열렸다. 올해로 3회째를 맞는 ‘핀터 페스티벌’은 핀터 씨를 사랑하는 연출가와 연극 전공 교수들이 모여 2002년 처음 선보인 행사. 이처럼 특정 작가의 작품 세계를 페스티벌 형식을 통해 해마다 심층 조명하는 경우는 핀터 씨가 유일하다. 9월 7일부터 10월 2일까지 1주일 단위로 ‘컬렉션’ ‘귀향’ ‘핫하우스’ ‘배신’ 등 핀터 씨의 주요 작품들이 연이어 무대에 올랐다.

핀터 씨의 작품 중에서 국내에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품은 1974년부터 ‘티타임의 정사’라는 제목으로 여러 차례 공연된 연극 ‘정부(情婦)’. 이 연극은 핀터 씨의 작품 중 유일하게 흥행에 성공했다.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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