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천변풍경]<3>엽편소설 ‘관음(觀音)’/심상대

  • 입력 2005년 10월 17일 03시 10분


동아일보사에서 천변을 따라 청계천 하류로 걸어 내려가노라면 관수교(觀水橋)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다리를 만난다. 낮이 가고 어둠이 내리면 그 다리 맞은편에 있는 센추럴관광호텔의 네온사인이 불을 밝힌다. 그리고 호텔 앞으로 나서는 벨 보이를 만날 수 있다. 금테를 두른 납작하고 붉은 원통형의 모자를 쓰고, 금색 견장을 어깨에 매달고, 붉은 제복을 입은 그 중년의 난쟁이 사내에게 물어보라.

“여기 어딘가 우리처럼 나이 먹은 중년들이 즐겨 찾는 술집이 있다지? ‘불 꺼진 창’을 들을 수 있다는 라이브 카페 말이오.”

“이제 그 노래는 들을 수 없소. 하지만 술이야 마실 수 있지….”

그가 손가락질하는 호텔 아래쪽 골목으로 들어서면 ‘올드 보이’라는 카페의 간판이 보인다. 난쟁이 벨 보이의 말대로 지금은 들을 수 없지만 한때 ‘올드 보이’는 불구의 중년 사내가 특유의 탁한 음성으로 처절하게 부르던 ‘불 꺼진 창’으로 유명했다. 다듬지 않은 반백의 곱슬머리를 어깨 녘까지 드리운 그 중년 사내는 라이브 카페 위층인 그 빌딩 꼭대기에 살고 있었다. 늘 휠체어에 앉아 지내야 했던 그의 한쪽 다리는 플라스틱 의족이었으며 다른 쪽 다리는 스테인리스 보장구로 지탱해야 할 만큼 가냘프게 뒤틀려 있었다.

시민들의 야간 산책로로 화려하게 다시 태어난 밤의 청계천. 지난 시절 이 청계천 언저리를 삶터로 삼아 살아가던 이들의 영혼을 달래주던 밤무대 가수의 애절한 노래가 있었음을, 흐르는 물은 기억할까. 동아일보 자료 사진

배호의 노래를 주로 부르던 그의 레퍼토리에 ‘불 꺼진 창’이 등장한 시점은 청계천 복원 공사의 시작과 함께 벌어진 또 다른 사건 때문이었다. 전동 공구상이 밀집한 이 골목 안에는 낡은 4층짜리 건물 두 개가 마주 보고 있는데, 오른쪽 건물 3층에 ‘올드 보이’가 위치하고 있지만 맞은편 건물 3층은 몇 년 동안 철제 자재 창고로 이용되고 있었다. 청계천 복원 공사와 함께 새 단장을 한 창고는 곧 안마지압원이라는 간판을 내달았다.

그날 밤도 흘러간 노래 몇 곡을 부르고 무대에서 내려선 중년의 가수가 휠체어 바퀴를 밀며 골목 쪽으로 난 창가로 다가갔다. 개업한 안마지압원의 유리창 내부가 들여다보였고, 그곳에는 길고 윤기 나는 머리채를 늘어뜨린 앳된 처녀의 모습이 환한 불빛 속에 서 있었다. 이후로 가수는 그 창가에 앉아 하염없이 저편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불구의 두 다리를 이끌고 빌딩 꼭대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는 여전히 창가를 떠나지 못했다.

저편 처녀의 모습은 대개 세 가지였다. 희미한 조명 아래에서 긴 머리채를 뒷머리로 틀어 올린 채 침상에 누운 사내 손님의 알몸을 매만지며 일에 열중하고 있거나, 빈 침상에 걸터앉아 쉬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 희미하던 조명이 대낮처럼 밝아지며 커튼과 유리창이 활짝 열리고 치렁치렁한 머리채를 늘어뜨린 처녀의 모습이 창가에 벼락같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정이 다가오면 저녁 내내 드나들던 손님과는 다른 방문객이 안마지압원 창가에 나타나곤 했다. 담배꽁초를 든 손을 부들부들 떨어대던 불구의 가수가 질끈 감았던 눈을 떴을 때, 어느새 커튼으로 가려진 저편의 유리창은 어둠 속으로 잠겨든 뒤였고 이쪽의 네온사인 불빛만이 그곳에서 번들대고 있었다.

어둠에 잠긴 그녀의 창 저편에서 벌어지는 일과 낯선 그림자의 정체에 대해서는 알려 하지 말자. 어느 시대든 이처럼 가련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차지하는 사내들이란 뒷골목 부랑아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세속의 이치가 아니던가. 가수도 그러한 뒷골목의 생리를 이해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가수는 무언가에 홀린 듯한 음성으로 ‘불 꺼진 창’을 부르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난쟁이 벨 보이 사내의 추리에 의하면 그 아름다운 처녀 역시 어느 때부터인가 라이브 카페에서 들려오는 ‘불 꺼진 창’을 듣고 있었다고 한다. 청계천 복원 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시점으로, 고가도로의 철거가 끝나고 막 땅파기 공정이 시작되던 그해 봄철 어느 날 밤이었다. 저녁 무렵 첫 무대에 오른 뒤, 무심코 출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린 가수는 낯익은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안마지압원에서 허드렛일 하는 노파의 손에 이끌려 카페 입구를 들어서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그 처녀였다. 가수는 처녀의 검은 안경과 테이블을 더듬는 흰 손을 바라보았다. 짐작대로 처녀는 중증의 맹인이었던 것이다.

처녀는 세 시간도 넘게 기다린 뒤, 기어이 그의 목구멍을 후벼 파며 터져 나오는 ‘불 꺼진 창’을 듣고서 생맥주 한 모금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래를 듣는 동안 그녀의 입가에 번지고 있던 희미한 미소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틀림없어요. 그 뒤로 그 집에 갔다 온 손님들이 다 그러던걸. 걔 손이 엄청 더 매서워졌다는 거지.”

이전부터 처녀에게 안마와 지압을 시술받았던 사람들은 그녀의 야무진 솜씨와 손맛을 칭찬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의 손맛이 한결 매서워져 젊은이도 비명을 터뜨릴 정도라는 것이다. 하지만 불구의 가수는 그녀의 매서운 손맛을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이마와 겨드랑이를 땀으로 적시며 처녀의 방으로 찾아간 가수는 철거덕거리는 보장구와 의족을 벗은 다음 침상 위에 누워 그녀에게 몸을 맡겼다.

가수의 외출은 일 년이 넘도록 이어졌다. 처녀의 손맛은 더욱 고약해져 가수의 입에서는 탄식과 같은 비명이 연이어 삐져나왔다. 불구의 손님을 다루는 손길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악기나 연장을 단련하듯이, 처녀의 희고 여린 두 손은 가수의 뼈와 뼈, 근육과 신경을 깊고 예리하게 파고들면서 짓눌러댔다.

청계천에서 시범 통수식이 있은 지 며칠 뒤의 일이다. 처녀 앞에 벌거숭이로 누운 가수가 이제 곧 닥칠 즐거운 고통을 맞이하려는 듯 호흡을 멈추었고, 처녀의 손가락 열 개는 뱀과 같이 가수의 몸을 덮쳤다.

가혹하고 긴 시술이 끝난 뒤, 안마지압원을 내려온 가수는 골목을 걸어 나와 가로수가 심어진 천변의 보도를 따라 관수교 쪽으로 향했다. 날이 저물어가며 청계천 물빛은 마지막 광기를 더해 더욱 푸르고, 그 위로 짙은 어둠의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하던 시각이었다. 간신히 관수교 한가운데에 다다른 가수는 난간에 몸을 기댄 채 그 아래로 흐르는 청계천 푸른 물 위로 네온사인 불빛보다 붉은 핏덩이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그날 밤, 관수교 난간에서 무대로 돌아온 가수의 ‘불 꺼진 창’은 어느 날의 열창보다 뛰어났다. 자신의 창가에 서서 그 노래를 듣던 처녀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얼굴 가득 띠고 있었다. 난쟁이 벨 보이 사내 역시 수긍했다.

“그 노래야말로 상처 입고 버림받은 영혼들만이 가 닿을 수 있는 곳에서 울려 퍼지는 진정한 음악이었다오.”

노래를 마치고서 웨이터 등에 업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가수는 그대로 숨을 거두었고, 이제 누구도 ‘올드 보이’에서 ‘불 꺼진 창’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만은 그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보고, 그 소리를 느끼고, 그 소리를 불러내서 간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난쟁이 벨 보이 사내가 알고 있었다. 자정도 지난 깊은 밤, 흰 손가락을 펼쳐 허공을 더듬으며 관수교 아래로 내려가는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관수교 아래로 내려가 물가에 주저앉은 처녀는 얼굴 위로 쳐들었던 열 개의 흰 손가락을 검은 청계천 물속으로 천천히 담갔다. 그러고는 손가락 끝으로부터 전해져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고통에 찬 환희의 노랫소리를 가만히 관음(觀音)하는 것이었다.

심상대 소설가

▽소설가 심상대 씨는▽

-1960년 강원 강릉시 출생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수학

-1990년 계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묵호를 아는가’ ‘명옥헌’ ‘사랑과 인생에 관한 여섯 편의 소설’ ‘떨림’ ‘심미주의자’ 등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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