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적 부처의 탄생을 표현한 미황사 괘불탱
그 후로 괘불탱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 조사로 이어졌다. 흔히 이러한 괘불탱의 기원을 티베트의 탕가에 두고 있지만 제작 동기나 그림의 질은 비교할 수 없다. 임진, 정유 양 왜란을 치르면서 전국은 초토화됐고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다. 절에서 천도재(薦度齋)를 올릴 때는 너무 많은 사람이 밀려와 야단법석(野壇法席)을 치는 바람에 야외에서 행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에 거대한 야외용 불화를 조성하게 된 것이다.
2004년 6월 말의 밤, 경남 양산 통도사 박물관에서 1727년에 그려진 미황사(美黃寺) 괘불을 조사했다. 아래 부분부터 차근차근 관찰하고 기록하는 사이에 내 마음은 점점 고양되기 시작했다. 이 괘불의 숨겨진 상징체계를 읽어냈기 때문이다. 역사적 실존 인물인 소승(小乘)의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 과정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날 역사적 존재가 아니라 변모된 대승(大乘)의 초월적이며 절대적 존재인 석가여래의 탄생 광경을 그 괘불에서 본 것이다. 미술을 통한 종교적 체험이었다. 그 탄생의 비밀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파악된 영기화생(靈氣化生)의 표현원리에 의해 풀 수 있었다.
미황사 괘불은 높이 11.70m, 폭 4.90m의 비교적 좁은 폭의 괘불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왼손은 배꼽 앞에 놓고 오른손 끝은 땅을 가리키는 자세)의 석가여래 입상만이 그려진 매우 단순한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림의 가장 아랫부분에는 연두색, 녹색, 붉은색, 갈색, 분홍색 등이 엇갈려 이룬 아름다운 여러 영기무늬의 갈래에서 오색 줄기와 오색 연봉(연꽃봉오리)이 나오고 그곳에서 커다란 붉은 연꽃과 분홍 연꽃이 각각 피어나 두 족좌(足座)를 이루고 그 위에 석가여래가 서 있다.
○영기가 부처로 화생함을 보여주는 다양한 변주들
흔히 부처는 연꽃 위에 화생하여 앉아 있거나 서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영기무늬에서 연꽃이 피고 그 위에 부처가 서 있다. 그러한 영기무늬는 대좌만 아니라, 여래의 왼쪽 아래의 용녀(龍女)가 들고 있는 항아리 속 여의보주가 발산하는 붉은 기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 이들 주변에 구름모양의 영기무늬가 밀집돼 있는데 역동적인 여러 모양의 갈색조 영기무늬가 밀집돼 있고, 다시 그 위로 여래의 신광(身光)에 이르는 공간에 연분홍색과 청색의 영기무늬가 아지랑이처럼 길고 유장하게 피어오르고 있다. 원래 기(氣)라는 것은 봄날 땅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가리켰다.
여래의 허리띠는 보살처럼 길지 않은데 이 그림에서는 두 발 사이까지 길게 드리워져 영기적 효과를 표현하고 있다. 흰 치마는 고구려 벽화처럼 녹색과 홍색으로 그려진 날아가는 구름모양의 영기무늬로 가득 채웠으며, 가사의 좌우 깃에는 여러 형태의 보주(寶珠)무늬가 장식돼 있다. 보주란 또 다른 영기의 응집이다. 화려한 녹색과 붉은색을 대비시킨 가사의 원형 장식은 놀랍게도 S자가 겹쳐진 고려 불화 속 영기무늬와 같다.
두광(頭光)의 둘레와 신광 좌우의 오색무늬도 영기를 표현하고 있는데 특기할 것은 그 주변의 구름무늬다. 자세히 보면 구름 안에 작은 구름무늬가 중첩돼 있는데 그 주변으로 회전하는 곡선의 형태로 영기의 싹이 표현됐다. 이 무늬가 구름이 아니라 구름 모양의 영기무늬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화면 최상단의 커다란 연꽃무늬 역시 중첩된 구름모양 영기무늬를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 대광명(大光明)을 상징하는 대연화(大蓮花)를 표현한 것이다. 끝으로 여래의 정상계주(頂上(결,계)珠·머리 맨 위에 있는 보주)에서 두 갈래의 영기가 뻗어나와 좌우로 갈라지는데 그 주된 형태가 삼국시대 불상의 광배에 표현됐던 태극무늬와 같다.
지금까지 괘불을 살펴보았는데 화면 전체에 가득 찬 10여 개의 영기 표현을 통해 결국 석가여래가 근원적 영기에서 탄생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미황사는 전남 해남 땅끝 바닷가에 위치하므로 이 괘불은 목숨을 잃은 어부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수륙재(水陸齋) 때 걸었던 불화다. 따라서 이 괘불에 관여한 사람들은 바다 및 용과 관련시켜 이러한 특이한 도상을 고안해 낸 것이리라. 대승적 석가여래의 탄생, 그것을 온갖 영기무늬의 변주로 나타낸 것은 감격적인 드라마였다. 부처의 영기화생의 특이한 도상을 이처럼 압축하여 표현한 예를 본 적이 없다. 잊을 수 없는 밤이었다. 고구려의 미술 전통이 이처럼 18세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강우방 이화여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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